무장단체의 반일투쟁과 민족운동 세력의 연대
반일투쟁에 나선 무장단체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 좌우합작단체의 결성과 함께 무장단체를 결성해 반일투쟁에 나서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졌습니다.
중국 관내 지역 최초로 결성된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의 대원 일부가 김원봉과 노선을 달리하며 1941년 중국공산당 관할 지역으로 이동해 조선의용대 화복지대를 결성했습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타이항산 일대에서 호가장 전투를 비롯해 여러 전투를 치렀습니다. 조선의용대 화복지대는 1942년 무정(본명 김무정)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됐습니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에서 적진 침투와 병사 모집, 그리고 선전, 첩보활동을 펼쳤습니다.
만주에서는 한인들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최대 3만여 명에 달하던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의 압박에 급속히 줄어 1940년에 이르러 거의 사라졌습니다. 남은 병력은 소련 연해주로 이동했습니다. 소련 정부는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동북항일연군 주축의 88 중조를 편성했습니다. 당시 전체 대원 600여 명 중 한인은 150여 명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충칭에 안착한 직후인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건했습니다. 처음에 총사령부만 창설됐던 한국광복군은 곧 병력을 모집하고 4개 지대를 편성하면서 무장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1942년 5월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를 제1지대로 편입하면서 3개 지대로 재편됐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중국 전역에 공작원을 파전해 병력을 모집하기도 했습니다. 모집된 인원은 현지 중국군관학교 분교에서 훈련받은 뒤 한국광복군에 편입됐습니다.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에 대한 군사 원조를 개시하면서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요구해 작전권과 인사권 등 제반 권한을 장악했습니다.
임시정부가 꾸준히 그 권한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끝에 1945년 4월에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미얀마 전선에 지대원을 파견해 일본군 포로의 심문과 정보 수집 등의 활동으로 영국군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광복군 제2지대는 임시정부와 미국전략첩보국(0SS)이 협정한 작전계획(독수리 작전)에 따라 1945년 봄부터 국내 침투 공작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8월 15일 갑작스럽게 해방이 되면서 국내 침투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조선건국동맹을 비롯해 여러 단체들이 일본이 패전하고 도래할 독립의 결정적 기회에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군사 준비에 나섰습니다. 조선건국동맹은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노농군을 편성할 계획을 세웠으며, 공산주의자 협의회는 군사부를 뒀습니다. 지리산에는 징병과 징용을 기피한 사람들이 모여 결성한 보광당이라는 유격대도 있었습니다.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의 연대와 합작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은 일본의 패망을 염두에 둔 독립전쟁 준비에 나섰습니다. 게다가 스탈린그라드전투(1942. 7~1943.2)에서 소련이 승리하고 미드웨이해전(1942. 6)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국내 민족운동 세력 내에 일본 패망이 곧 독립이라는 공감대도 자연스럽게 형성됐습니다.
해방 직전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은 대부분 좌우합작의 연대체로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물론, 재미한족연합회, 조선독립동맹, 조선건국동맹 등이 반일 해방을 목표로 한 좌우합작체였습니다. 임시정부는 좌파 세력이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 정부로 재편됐습니다. 미국에서는 우파인 북미대한인국민회, 동지회 등과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등을 포함한 9개의 단체가 연대해 1940년 재미한족연합회를 발족했습니다. 그리고 항일 전선의 통일과 임시정부 지지, 군사운동, 대미 외교기관 설치, 독립금 모금 등을 임무로 천명했습니다. 조선독립동맹은 1942년 중국 화북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후신으로 결성되어 해방 직전까지 중국공산당 관할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도 연대와 합작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협력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습니다.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이 일본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하나로 묶는 연대를 추구했던 것은 이러한 국제 연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는 중국 화북 지방에서 활약했던 조선독림동맹과, 만주에서 활약했던 항일유격대와 연대를 모색했습니다. 먼저 조선독립동맹과 연대를 시도했는데, 1944년 4월 김구가 조선독립동맹 지도자인 김두봉에게 서신을 보내며 양자 간 교류가 시작됐습니다. 임시정부에서 개최하는 해외항일조직 대표회의와 조선독립동맹이 주최하는 전조선민족대회에 서로 대표자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임시정부는 만주에서 활약했던 항일유격대와도 연대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김구의 특사가 신임장을 갖고 만주로 가던 중 해방을 맞았습니다. 만주를 떠나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해 88 중조여단에 속해 있던 동북항일연군 출신 항일유격대도 임시정부와 연계를 시도했습니다.
조선건국동맹은 조선독립동맹과자주 접촉하고 연대하면서 조선독립동맹이 조선건국동맹을 국내 지부라고 부를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양자 간의 접촉은 주로 베이징에서 이뤄졌습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5년 5월 충칭의 임시정부에도 특사를 파견했으나 접촉에는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은 일본 패망을 앞두고 단일한 항일 연대를 꾸리고자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 조선독립동맹과 조선건국동맹의 연대 가능성은 높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