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국가와의 조약 체결
조선책략의 유입과 대미 조약 체결 여론의 대두
1880년 5월 조선 정부는 일본의 무관세 무역 및 쌀 수출에 따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수신사 김홍집(1842~1896)을 일본으로 파견합니. 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김홍집이 전권이 없다는 이유로 교섭 자체를 거부해버립니다. 그냥 돌아갈 수 없었던 김홍집은 도쿄 주재 청국공사 허루장을 찾아가 근대적 관세제도를 논하고, 러시아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따른 대책을 상의합니다. 여기에서 허루장은 조선의 관세자주권 확보를 강조하며, 러시아 침략에 대한 대책으로 균세정책에 입각한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을 제안합니다. 특히 그는 서구 열강 중에서 미국과 가장 먼저 체결할 것을 권유했는데, 미국이 일본의 조약 개정안을 조건부로 수락(미일관세개정약서)한 유일한 서구 열강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다른 국가를 침탈하지 않았다는 점도 추천의 이유였습니다.
청국공사관 참찬관 황쭌셴(1848 ~ 1905)은 '연미론'에 입각한 「조선책략」을 김홍집에게 전달합니다. 귀국 후 김홍집은 고종에게 관세자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건의합니다. 1880년 11월 고종은 청에 조선이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할 의사가 있음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조사시찰단 조사를 바탕으로 관세자주권 확보 및 주요 수입품의 관세율을 10%로 규정하는 통상 방침을 수립합니다.
한편 당시 조선 조야에서는 보수 유생층을 중심으로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위정척사파는 서학을 사학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대미 수교 방침에 반대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위정척사파 인사들을 처벌해 문호개방정책에 반대하는 여론을 차단하고자 합니다.
청의 중재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1881년 11월에 조선 정부는 영선사 김윤식(1835~ 1922)을 텐진으 로 파견합니다. 김윤식은 청의 북양대신 리홍장에게 조선의 관세자주권 및 주요 수입품의 관세율을 10%로 명시한 조약 초안을 제시합니다. 김윤식은 대미 수교를 위한 청 정부의 중재를 요청하고, 조약 체결 교섭에 참여하고자 했지만 리훙장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1882년 3월 톈진에서 리훙장과 미국 전권대사 로버트 W. 슈펠트의 교섭이 시작됩니다. 리홍장은 조약 제1조에 "조선은 청의 속방이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려고 했습니다. 슈펠트가 반대하자, 리훙장은 김윤식에게 속방조회문을 미국 정부에 통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청은 속방조회문을 통해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대외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1882년 5월 슈펠트와 청의 마젠중이 제물포에 도착하자 조선 정부는 전권대신 신현과 부대신 김홍집을 제물포로 파견합니다. 그리고 조선과 미국은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 일)에 14개 조로 구성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이하 '조미조약')을 체결합니다.
조미조약 제1조에는 조선이 외세의 침략에 직면했을 때 미국의 개입을 요청할 수 있는 거중조정이 명시됩니다. 미국은 치외법권(제4조)과 최혜국 대우 권리(제14조)를 얻습니다. 그런데 제5조에서는 조선의 관세자주권을 보장했으며, 수입관세율을 10%(일반품) 이하, 30%(사치품) 이하로 규정합니. 이 조항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협정관세와 5%의 수입관세율을 강요받았던 청과 일본의 조약과는 달랐습니다. 게다가 조미조약은 청과 일본에서 서양인의 참여를 보장했던 개항장 간 무역을 금지했습니다. 청에서 서양 상인에게 부여했던 내지통상 역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통상과 관련해 청과 일본보다 유리한 내용으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조미조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과 독일은 청 정부에 조선과 조약 체결을 위한 중재를 요청합니다. 영국과 독일은 조미조약과 동일한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리훙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조선은 영국(제1차 조영조약), 독일(제1 차 조독조약)과 차례로 조약을 맺습니다.
서구 열강과의 조약의 원형이 된 제2차 조영조약
그런데 도쿄 주재 영국공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는 제1차 조영조약 비준을 반대합니다. 청과 일본이 제1차 조영조약을 근거로 영국에 조약 개정을 요구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1883년 11월, 영국은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해 파크스를 전권대사로 서울에 파견합니다. 조선과 영국의 조약 교섭에서 쟁점이 된 부분은 수입관세율이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면제품을 비롯한 주요 수입품의 관세율을 8%로 정했습니다. 이는 1883년 7월 체결한 조일통상장정에서 적용한 세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파크스는 7.5%의 수입 관세율 적용을 주장합니다. 이는 청에서 실질적으로 시행 중인 수입관세율(수입관세율 5%+내지세 2.5%)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파크스는 주요 수입품의 관세율을 7.5%로 하되, 일부 품목의 세율을 상향 조정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당시 협상을 지휘했던 고종과 중전 민씨는 파크스의 제안을 수용합니다. 조약 협상이 결렬됐을 경우, 협상 과정에서 배제된 청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1883년 11월 26일(음력 10월 26일) 조선은 영국과 수호통상조약(제2차 조영조약)을 체결합니다. 제2차 조영조약에서는 조선의 관세자주권이 부정되었습니다. 조선이 수입관세율을 외형적으로 4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청과 일본에서 시행 중인 관세율과 유사하게 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조선에서 개항장 간 무역 및 내지통상의 권리를 확보했으며, 최혜국 대우 및 치외법권의 특권도 관철시켰습니다. 파크스는 청과 일본에서 시행 중이던 조약의 내용을 제2차 조영조약에 집약했습니다. 독일을 필두로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는 제2차 조영조약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합니다. 조약 비준을 완료한 미국도 최혜국 대우 특권을 근거로 제2차 조영조약의 혜택을 누립니다. 제2차 조영조약은 조선이 서구 열강과 체결한 조약의 원형이 됐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은 동아시아 불평등조약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