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정부의 붕괴와 대한제국의 수립
삼국간섭과 명성황후 피살
1895년 4월 청일전쟁에 대한 강화회담을 통해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지면서 동아시아 정국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만주에 진출하는 것에 반대해 독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을 가했고, 그 결과 랴오둥반도가 중국에 반환됩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전략도 더 이상 추진되기 어려워졌습니다. 일본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면서 조선 정부도 변화를 맞게 됩니다.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이어 박영효가 주도권을 행사한 박정양 내각이 등장했지만, 박영효가 반역모의 혐의로 축출되면서 보수적인 정부로 교체됩니다. 또한 그간 진행된 급격한 개혁으로 지방의 이서, 군인 등이 개혁에서 배제되고 일자리를 잃으면서 불만이 쌓였고, 일부 관리와 지방 유생 등이 일본의 과도한 간섭을 비판하는 분위기도 고조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 더 강하게 개입하며 상황을 바꾸려고 하다가 결국 1895년 10월 8일 왕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러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을미사변입니다. 을미사변은 신임 조선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둔 일본군과 영사관 경찰 및 낭인들을 경복궁에 잠입시켜 왕후를 살해하게 한 사건입니다.
을미개혁의 추진과 개혁의 중단
이후 갑오개혁 정부는 일본의 후원 아래 태양력 채택과 단발령 등 급진적인 개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갑오개혁 정부는 일본의 근대 개혁을 모델로 삼아 위로부터 국가제도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먼저 국왕의 권한을 일부 제한했으나 관료 임면권을 얻지 못했고, 국왕의 신임도 받지 못해 입헌군주제와 같은 체제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복잡한 행정조직을 개혁하고 재판제도를 도입하는 등 근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려고 했음에도 정작 근대 입법기관으로 의회를 세우지는 못하고 지방 향회를 허용하는 정도에 머무릅니다. 무엇보다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정책을 강제로 밀어붙이려는 나머지 여론을 수렴하거나 여타 세력을 포용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토벌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개혁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는 악수를 둡니다.
결과적으로 갑오개혁 정부는 일본의 지속적인 후원에 기대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보호국화 전략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을미사변을 계기로 친일 종속정권으로 권력 기반도 축소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일본과 갑오개혁 정부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봉기하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고종과 측근 관료들이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갑오개혁 정부는 일시에 붕괴되었고 개혁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대한제국의 수립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고종에게 아관파천은 왕후를 살해하고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던 일본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비상수단이자, 일종의 친위쿠데타였습니다. 그러니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1년 가까이 머물면서 국가의 위신에 상당한 손상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 기간 러시아를 필두로 열강의 막대한 이권 침탈이 자행돼 조선은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게 되면서 고종의 운신의 폭이 갑오개혁 시기보다 넓어지기도 합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진 이 시기부터 1904년 러일전쟁 발발까지, 조선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은 그동안 일본에 협력한 일부 갑오개화파 관료에 체포령을 내려 그들을 처단하거나 축출합니다. 갑오개혁 때 도입된 내각제도를 폐지하고 1896년 9월 24일 새로운 형태의 의정부를 조직해 국왕 중심의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도 했습니다. 군주권 확립에 대한 국왕의 의지, 자주독립에 대한 사회적 자각과 활동이 어우러져 대한제국 수립의 환경이 조성됩니다. 또한 당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1897년 2월 고종은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돌아옵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칭제건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유도했고, 심순택, 조병세, 권재형(권중현으로 개명) 등 전현직 관료들과 정교, 장지연 등 신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상소에는 청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열강의 간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확립하기 위해 조선도 황제의 나라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칭제건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반면에 최익현, 유인석 등 보수 유학자들은 서양 의례에 따라 존호를 변경하는 것은 곧 금수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일로, 스스로의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행동이라고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또 윤치호(1865~1945) 등 독립협회의 일부 회원은 내정 개선으로 실질적인 자주독립의 기반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판은 칭제건원을 가로막을 만큼 대중적 여론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8월 17일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변경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환구단을 조성해 10월 12일 국왕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이날 고종은 하늘과 땅에 제사지낸 후 황제의 면복을 입고, 황금색 옥좌에 앉아 황제의 옥새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인 13일에는 국호를 '대한'으로 변경했습니다. 당시 국호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승인받은 것이었기에 독립국의 위상이나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일통해 제국을 형성했다는 의미에서 대한을 새로운 국호로 결정합니다.
대한제국 수립의 의미는 군주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열강의 국권 침탈로 무너져가는 국가의 자주독립체제를 강화하자는 데 있었습니다. 황제국을 선포한 뒤 정부는 대한제국에 대한 열강의 반응을 살피며 회답을 촉구했고, 러시아, 프랑스, 일본, 영국, 미국 등이 성립을 승인합니다. 다만 청은 대한제국의 칭제건원을 스스로의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행동이라고 비난하며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99년 9월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어쩔 수 없이 승인하게 됩니다.
한편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해 황제권력을 강화하면서, 이와 더불어 근대화를 추구하는 방향 아래 각종 행정, 법률체계를 재편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