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와 고종의 갈등
국가운영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을 확립해야 한다는 여러 정치세력의 공통된 문제의식 아래 창립됐지만, 국가운영에 대해서는 서로 생각이 달랐습니다. 황제는 아관파천으로 실추된 군주권을 강화하려 했고, 서재필은 민중 계몽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했으며, 정동구락부 세력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내정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1898년 2월 이후 독립협회가 민권운동과 참정권 획득운동을 전개해가는 동안 황제권력과의 갈등이 표면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고위 관료들이 독립협회에서 탈퇴했고,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노선 대립도 나타났습니다. 윤치호, 이상재 등의 온건파는 관리와 백성의 화합을 표방하며 고종 황제와 협력해 내정 개혁을 이루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안경수, 정교 등 급진파는 박영효 등 국외 망명자와 결합해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만민공동회가 대중시위로 발전하는 정세를 이용해 중추원을 새로 구성하고, 중추원이 의정부 대신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갈등의 시작
당시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막기 위해서 1898년 3월 10일부터 서울 시내에서 만민공동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했습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대규모로 참석하면서 이는 한국 근대 정치집회의 효시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결국 러시아는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을 철수하고,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했으며, 한러은행을 폐쇄합니다. 이 과정에서 민권의식이 높아져 독립협회는 이를 기반으로 민권 보장 및 권력 개편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가게 됩니다.
독립협회가 주요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자, 황제와 보수파 관료들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5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하고 미국으로 추방해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의 활동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안경수, 정교 등의 급진파는 7월 초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홍범 14조」를 준수하고, 공평한 인재 등용, 민의의 수용 및 의정부 관료들의 교체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안경수가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와 황제의 퇴위를 모의한 이른바 황태자 대리 청정 사건을 주도했다는 것이 발각됩니다. 이에 황제는 조병식 등 보수파 관료를 기용하고, 이들을 통해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독립협회 회장대리 윤치호가 고종을 알현해 정부와 민간이 협동한다는 의미의 관민상화를 역설하며 반감을 무마시킵니다. 황제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학생, 상인 등 민중이 시위에 참여해 독립협회를 지지했고, 이같은 민심에 밀려 결국 황제는 보수파 관료를 해임하고.독립협회에 우호적인 박정양 내각을 수립하게 됩니다.
의회 설립운동의 추진과 반발
이 시기부터 독립협회는 의회 설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합니다. 박정양 내각은 모든 잡세를 혁파하고 중추원 의관 중 절반을 독립협회에서 선발한다는 내용을 담은 중추원 개편안 등의 독립협회 안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중추원 개편을 의회 개설 시도로 인식했던 황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다시 보수 관료 및 황국협회를 동원해 박정양의 탄핵을 유도했고, 독립협회와 이에 호응한 시민의 토론과 집회를 제한하는 조칙을 내립니다. 이에 대해 독립협회는 철야농성까지 벌이며 강력히 반발했고 황제는 결국 조칙을 철회하고, 「중추원관제」의 개정을 지시하기에 이릅니다.
황제와 독립협회 간의 갈등은 정부의 관료들도 참석한 10월 29일 관민공동회에서 정점을 맞습니다. 그동안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이 참여해 개최됐지만, 이 자리에서 독립협회는 국정개혁안으로 「현의 6조」를 제시하고 참석한 정부 고관들에게 이를 수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현의 6조」는 제1조로 황제권의 강화를 규정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표면적으로 황제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황제가 희망한 무제한적 군권 행사를 의미하지 않았는데, . 제 1 조 외에 다른 조항들은 황제권을 제한하는 입헌 군주제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 강력한 전제 황권을 추구한 황제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관민공동회가 열린 다음 날인 30일 민심을 확인한 황제는 「현의6조」의 실행을 재가합니다. 이에 박정양 내각은 「중추원관제」를 공포하는 동시에 독립협회에 의관의 절반에 해당하는 25명을 선발해줄 것을 통보합니다. 그러나 11월 4일 조병식 등 보수파 관료들은 독립협회가 국체를 공화정으로 변경해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를 세우려 한다는 음모설을 제기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곧바로 관민공동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해 독립 협회 등 모든 단체의 해산 명령을 내렸고, 회장 윤치호를 비롯해 이상재와 정교 등 17명을 체포해버립니다. 이어 고종은 「헌의 6조」에 동의했던 박정양도 파면했고, 보수파 내각을 수립합니다.
독립협회의 해산
고종 황제의 이와 같은 조치에 독립협회는 서울의 민중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완강하게 저항합니다. 다시 민심에 밀린 고종 황제는 조병식 등을 해임하고, 구속자 전원을 석방합니다. 그럼에도 만민공동회는 해산을 거부하고 「현의 6조」 실시, 독립협회의 복설 등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집회를 확대해갑니다. 외국 공사들이 반대해 경찰과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던 고종 황제는 보부상 단체인 황국협회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습격했지만,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1월 26일 만민공동회가 재개됩니다. 고종은 윤치호를 중추원 부의장에, 총 50명의 중추원 의관 중 독립협회 계열 17명을 중추원 의관에 임명하는 등 유화책을 제시합니다. 반면 32명은 황국 협회 계열, 나머지 1명은 도약소 계열로 충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추원은 독립협회가 주장한 의회가 아닌 정부의 자문기구에 불과했기에 12월 초 만민공동회를 다시 개최해 대정부 공세를 강화합니다. 여기에 더해 독립협회 내 급진파는 박영효의 사면 및 소환을 요구하면서 정변을 일으킬 기세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고종 황제와 정부를 결정적으로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윤치호: 이상재 등 온전하로 만민공동회에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이 반발하는 상황까지 초래합니다. 이때는 상황을 주시하던 주한 외국 공사들도 무력 진압에 동의했기에 고종 황제는 12월 23일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진압하고 독립협회를 해산시킵니다. 이로써 독립협회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헌의 6조」
제1조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해 황제권을 공고히 할 것.
제2조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해당 부처의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날인해 시행할 것.
제3조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담해 맡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제4조 중대한 범죄는 공판하고, 피고에게 충분히 설명하여 그가 자복한 후 (형벌을) 시행할 것.
제5조 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에 그 뜻을 물어 과반수가 동의하면 임명할 것.
제6조 「장정」(갑오개혁기에 제정된 법령들)을 실천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