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무장투쟁과 의열단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는 독립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됐습니다. 1919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북간도와 서간도에서 조직된 독립군 부대만 50여 개에 달했습니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조선 주둔 일본군은 1920년 6월 독립군 부대를 없애려고 250여 명의 추격대를 편성해 국경을 넘어 훈춘 부근의 봉오동 쪽으로 진격해왔습니다. 최진동, 홍범도(1868~1943)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는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계기로 2만여 명의 대병력을 동원해 서간도와 북간도를 침략했습니다. 독립군 부대들은 일단 일본군과의 정면승부를 피하고 백두산 서쪽 산록으로 이동했습니다. 독립군 부대의 동태를 파악한 일본군이 추격 부대를 파견했습니다. 1920년 10월 김좌진( 1889~1930)이 이끈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끈 연합부대는 백두산 산록 청산리 일대에서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에 맞서 큰 손실을 입히고 추격을 뿌리쳤습니다(청산리 전투).
자유시 사변
일본군이 독립군에 대한 보복으로 한인 촌락을 습격해 한인 이주민을 학살하고 건물을 불태우는 경신참변을 일으켰습니다. 1920년 10월과 11월에만 북간도 8개 현에서 3,600여 명이 살해됐고 3,200여 채의 가옥이 불탔습니다.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간도를 침략하면서 1920년 정점에 달했던 독립전쟁은 일단 위축됐습니다.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북만주의 밀산에 집결했다가 1920년 말부터 연해주로 이동했습니다. 1921년 초 북로군 정서를 비롯한 일부 부대는 러시아 혁명군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북만주로 돌아왔습니다. 홍범도, 지청천(1888~1957, 일명 이청천) 등이 이끈 독립군 부대는 북으로 이동해 1921년 3월 자유시(스보보드니)에 도착했습니다.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 혁명군과 함께 활동한 최고려가 지휘하는 자유대대, 니콜라스크 빨치산 부대 지휘관인 박일리아(1891~1938)가 이끄는 사할린의용대 등의 유격대도 자유시에 집결했습니다.
여러 한인 부대를 고려혁명군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자유대대와 사할린의용대가 충돌했습니다.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혁명군과 자유대대 측이 사할린의용대와 일부 독립군 부대 주둔지를 포위하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할린의용대 등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를 '자유시사변’이라고 부릅니다. 비극이 일어난 배경에는 한인 사회주의자 사이의 대립이 자리했습니다.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사할린의용대는 상하이 고려공산당의 세력 아래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양자의 유혈 충돌로 큰 타격을 입은 독립군 부대는 연해주를 떠나 다시 만주로 돌아왔습니다.
3부의 한인 자치에 기반한 무장투쟁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 부대들은 재기를 도모했습니다. 1922년 8월 북만주 지역에 서는 대한독립군단이, 남만주 지역에서는 대한통의부가 탄생했습니다. 1924년 5월에는 대한통의부의 일부 세력이 이탈해 참의부를 결성했습니다. 서간도에 근거지를 둔 참의부는 임시정부 산하단체로서 군사 활동에 치중했습니다. 대한통의부는 1924년 11월 정의부로 확대 개편됐습니다. 하얼빈 이남의 만주 중앙을 근거지로 하는 정의부는 군사기구이자 자치기구라는 이중적 위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1925년 3월에는 대한독립군단과 북로군정서가 통합해 신민부를 출범시켰습니다. 만주 동부 지역에 자리한 신민부 역시 군사기구이자 자치기구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 만주에서는 3부, 즉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성립했습니다.
1920년대 후반 만주에서는 민족 유일당운동의 흐름 속에 3부 통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통합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이 달라 1929년에 북만주의 혁신의회와 남만주의 국민부로 재편됐습니다.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의 지도를 받았고, 무장 부대로서 조선혁명군을 뒀습니다. 혁신의회는 1930년 한국독립당으로 탈바꿈하고 한국독립군을 결성했습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는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한국독립군은 1932년 9월과 11월에 쌍성보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다음 해 6월의 동경성전투와 7월의 대전자령전투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조선혁명군은 1932년 3월 영릉가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후 환인현, 통화현, 유하현 일대를 평정했습니다. 다음 해 2월에는 흥경성전투에서도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1932년 3월 만주국이 수립되고 일본군이 만주 전역을 점령하자 일본군과 지속적인 전투를 벌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한국 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주도 세력은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과 손을 잡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동부 지방을 벗어나 산하이관 이남인 관내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의열단: 의열투쟁과 민중 직접 혁명론
1919년 11월 10일 만주에서 황상규(1890~1931)의 지도와 김원봉(1898~1958)의 주도로 단원 13명이 모인 가운데 의열단이 창립됐습니다.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 공작을 주 임무로 삼았습니다. 특히 식민지배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와 식민지배기관을 직접 겨냥한 거사에 주력했습니다. 창단 직후 근거지를 베이징으로 옮겼으며, 1924년 무렵에는 70여 명의 단원을 거느렸습니다.
의열단은 과감한 행동으로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알렸습니다. 1920년 박재혁(1895 ~1921)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1894~1921)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1921년 김익상(1895~1942)의 총독부 폭탄 투척, 1922년 상하이에서 오성륜(1900~?) 김익상, 이종암의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1923년 김상옥(1889~1923)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김지섭 (1885~1926)의 도쿄 니주바시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1892~1926)의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 투척 등은 모두 의열단이 일으킨 거사였습니다.
의열단 의열투쟁의 사상적 기초는 아나키즘(anarchism)이었습니다. 아나키즘의 어원은 '지배자가 없다', '권력이나 정부가 없다'는 그리스어 아나코(an-atchos)입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는데,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을 부정했습니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 국가권력 부정은 식민권력, 즉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반권력, 반제국주의 투쟁은 독립운동과 결합할 수 있었습니다.
아나키즘은 민중의 직접행동을 강조했습니다. 신채호는 1923년 의열단의 투쟁 지침으로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 직접혁명론을 제창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첫째, 지금까지 혁명은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의 이름을 변경한 것에 불과했으나 앞으로 혁명은 민중이 스스로를 위해 하는 혁명, 즉 민중 직접혁명이어야 합니다. 둘째, 민중 직접혁명을 완수하려면 먼저 깨달은 민중이 혁명적 선구가 돼야 합니다. 셋째, 일본 제국주의를 쫓아내고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폭력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즉 민중과 폭력 가운데 하나가 빠지면 그것은 곧 수그러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폭력혁명의 수단으로는 암살, 파괴, 폭동 등이 제시됐습니다.
그러나 의열단은 1925년 이후 암살, 파괴 활동에서 무장군사 활동으로 노선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식민지배를 끝내기 위해서는 요인 암살과 기관, 시설물 파괴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민중의 조직적 무장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열단은 본부를 광저우로 옮기고 핵심 단원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