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Talk

실력양성운동과 자치론의 등장

우공 박 2023. 6. 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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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양성운동

3.1운동 이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정치활동과 사회운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때 많은 민족주의자가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실력양성론을 주장했습니다. 실력양성을 위한 방법으로는 교육의 보급을 통한 인재양성과 민족 자본의 육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으로 구체화됐습니다.

조선총독부가 1918년부터 3개 면당 1개 학교정책을 실시하면서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가 늘어났으나 한국인의 교육열을 수용하기에는 여전히 학교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했습니다. 더욱이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 등의 증설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한국인의 사립학교 설립과 운영은 억제됐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인 사이에 교육 기회를 늘리자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1920년 차미리사(1830~1955)는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순회강연을 통해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사와 조선청년회연합회가 한국인 본위 교육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가운데 대학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1922년 이상재(1851~1927)를 대표로 한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결성됐고, 이듬해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됐습니다. 조선민립 대학기성회는 서울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지역에는 군 단위의 지방부와 면 단위의 지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힘으로 민립대학을 설립한다는 원칙을 정한 후에 '일천만이 일 원씩'이라는 구호 아래 1,000만 원 모금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모금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간도와 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전개됐습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계속되는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 더해 1923년부터 전국적으로 가뭄과 수해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원활하게 전개되지 못했습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강습소와 야학 등 대중교육기관의 설립이 더 시급하다며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는 비판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방 유력자들의 참여도 저조해 모금운동이 어려워지자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중단됐습니다. 총독부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견제하는 한편,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습니다.

 

한편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되고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철폐문제가 가시화되자, 한국인 자본가들의 위기의식이 커졌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평안도 지역의 민족주의자와 자본가들은 이 문제에 대응하고자,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1883~1950)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했습니다. 조선청년회연합회는 1922년에 "내 살림 내 것으로"와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표어를 선정했고, 동아일보사도 사설을 통해 물산장려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마침내 1923년 1월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조직됐습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사 쓰자"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고, 선전 강연회를 열거나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토산품 애용을 강조한 물산장려운동은 청년운동단체의 금주, 단연운동이나 소비 절약 운동과 결합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물산장려운동이 확산되면서 각 지역에는 토산장려회나 물산장려회를 표방하는 단체들도 생겨났습니다. 국내 상해파 사회주의자들도 사회주의혁명을 위해서는 생산력 증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물산장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물산장려운동은 1923년 여름 이후 급속히 쇠퇴했습니다. 일본 자본에 비해 규모나 기술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인 자본은 수요를 뒷받침한 만한 생산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자본가와 상인은 수요가 늘자 물건값을 올려 이익을 취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또한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이 자본가와 중산계급이 민족이라는 이름을 이용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 이기적인 운동이며 일본 물품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전개된 것도 아니라고 비판하여, 물산장려운동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치운동

친일 정치 세력은 독립을 포기하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아들인 채 그 속에서 정치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한편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자치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이는 1920년대에 걸쳐 모두 세 차례나 불거졌습니다. 첫 번째 움직임은 1923년 말부터 1924년 초에 본격화됐습니다. 이를 주도한 이는 김성수(1891~1955), 송진우(1887~1945) 등 동아일보사 그룹과 천도교 신파인 최린(1878~1958) 등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력한 민족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연정회 준비 모임을 주도했습니다.

 

동아일보사는 조선총독부를 보호하자고 요구하는 사설과 더불어 법률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합법적인 정치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1924년 벽두에 게재했습니다. 이는 이후에 타협적 민족운동 반대와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자치운동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1925년 11월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 사장 소에지마 미치마사(1871~1948)가 자치론을 주장하자 자치운동은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1926년 초까지 일본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자치를 놓고 찬반 논란이 전개되는 가운데, 김성수와 최린 등은 다시 자치운동단체를 조직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자치운동 반대를 내걸고 민족협동전선인 조선민홍회와 신간회를 조직했습니다. 때마침 자치운동을 후원하던 사이토 총독도 조선을 떠나면서, 자치운동은 다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929년 8월 사이토 총독이 재부임하자 자치운동의 세 번째 움직임이 전개됐습니다. 총독부는 조선의회 설치를 골자로 하는 자치안을 제시했고, 이에 최린과 김성수, 송진우 등은 다시 자치운동에 대한 협의를 전개했습니다. 또한 신간회 본부의 김병로(1887~1964), 박문희 등과 조선청년총동맹 지도부의 허일, 이항발 등도 당면 이익 획득운동이나 합법운동을 주장하면서 이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회 설치가 무산되고, 지방제도 개정도 1930년 12월에 자문기관인 도평의회, 부협의회, 면협의회를 도회, 부회, 면회 등 형식적인 의결기관으로 변경하는 데 그치면서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의 자치운동은 힘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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