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Talk

대공황과 만주사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우공 박 2023. 6. 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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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만주사변

1929년 미국에서 시작한 대공황은 이듬해 일본과 유럽으로 확산됐습니다. 이 공황은 세계를 강타하며 4년이나 지속됐고, 그동안 세계 무역량은 65% 줄었습니다.

1930년 런던에서는 영국,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5개국이 모여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해 긴축 재정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열강의 공항 타개책은 각국의 처지에 따라 달랐습니다. 미국은 거대한 국내 시장을 토대로 한 뉴딜정책을 공황 극복책으로 추진했습니다. 식민지를 많이 보유한 영국과 프랑스 등은 본국과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국내 시장이 작고 식민지도 적었던 까닭에 파시즘에 기반한 침략전쟁을 통해 공황을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파시즘 정권이,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er, 1889~1945)의 나치즘 정권이 들어서 군비를 확장했고, 1930년대 중반부터 두 국가는 대외침략에 나섰습니다.

 

일본에서는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에 800개 이상의 기업이 도산했고, 300만여 명의 실업자가 생겨났습니다. 미국이 보호무역주의정책을 실시하면서 생사 수출이 막혀 농촌의 양잠업이 붕괴했고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1931년에는 대흉작까지 겹치면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군비 축소에 불만을 품은 일본 관동군이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했습니다. 관동군은 펑톈성 북부 교외 류타오거우 지역에서 일본이 경영하던 남만주철도의 일부 구간을 폭파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이 소행을 구실로 중국군의 주둔지와 평톈성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습니다(만주사변). 이때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까지 국경을 넘어 관동군을 지원했으며 이후 4개월 동안 일본군은 산하이관에서 헤이룽장성까지 일본 국토의 세 배에 해당하는 중국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다음 해인 1932년 3월 일본 정부는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하자 국제연맹은 리튼(Lyton)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1933년 국제연맹 총회가 만주에 대한 중국 주권을 인정하고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채택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국제연명을 탈퇴했습니다.

 

만주국은 연호를 대동으로 하고 수도한 신징(창춘)에 뒀으며. 퇴위한 청의 선통제 푸이(1900~1967)를 집정으로 세웠습니다. 1934년에는 제정 실시를 선포하면서 푸이를 황제로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만주국 정부에서 실권을 가진 총무청 장관과 차관은 모두 일본인이었습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만주국에 대한 승인을 전면 거부했습니다. 일본이 자행한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은 만주 지역만이 아니라 국내와 중국의 관내 지역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 세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만주사변 전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노동운동, 농민운동, 대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접어들면서 조선총독부는 사회운동을 점차 거세게 탄압했습니다. 대중운동 전반이 위축되는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공산당을 결성하라는 12월 테제에 따라 본격적인 당 재건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운동의 하나로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1929~1931년의 초기 당 재건운동은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 세력의 분파에 기반해 각자가 전국 차원의 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형태로 추진됐습니다. 서울상해파는 만주에서 1929년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볼셰비키와 대중 기관지인 노력자신문을 간행했습니다. ML파는 만주에서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회를 결성했고, 국내에서는 1931년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 등을 조직해 활동했습니다. 레닌주의 그룹을 이끈 ML파 출신의 안광천은 1929년 의열단장인 김원봉(1898~1958)과 함께 상하이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만들었습니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은 베이징에 중앙부와 레닌주의정치학교를 두었습니다. 이 학교를 졸업한 활동가들이 국내에서 당 재건운동에 나섰습니다. 코민테른이 파견한 콤뮤니스트 그룹은 1929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상하이에서 콤뮤니스트를 발행해 국내에 반입시켜 전국 각지의 9개 공장 세포조직에 배포했습니다. 하지만 각 분파별로 전개한 조선공산당 재전운동은 수차례에 걸친 검거로 대부분 와해됐습니다.

 

1933년경부터는 권영태 그룹과 이재유 그룹을 중심으로 당 재건운동이 전개됐습니다. 권영태는 프로핀테른(Profintern) 원동총국의 당 재건 지시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1934년 경성공산주의자그룹을 조직했으나 곧 체포됐습니다. 1933년 이재유(1905~1944)를 중심으로 결성된 경성트로이카는 초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분파성을 비판하고, 생산 현장에서 대중활동과 대중투쟁을 강화해 당 재건의 인적, 물적 토대를 닦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경성트로이카는 이재유가 1936년 체포될 때까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 그룹 등으로 개편되어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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