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Talk

1930년대 민족 운동(한인애국단, 정당 통일 운동, 항일 유격대)

우공 박 2023. 6. 5. 13:43
반응형

한인애국단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습니다(만보산사건). 국내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한인이 입은 피해가 과장 보도되면서 중국인 100여 명이 학살되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중국인들은 크게 격앙했고 양국인 간 감정이 악화됐습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도 이로부터 2개월 뒤였습니다.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인의 반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항일 거사를 일으키자고 결의하며 내무총장인 김구(1876-1949)에게 실행을 일임했습니다.

 

김구는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차 거사로 이봉창 의거를 준비했습니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다가 상하이로 건너온 노동자였는데, 그곳에서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을 했습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에서 천황 일행이 탄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저격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무렵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중국인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과 일본인 거주민이 갈등하자, 이를 빌미로 1월 28일 일본 해군 육전대 및 항공부대가 상하이에 상륙해 중국군과 한 달간 전투를 벌였고 결국 중국군이 퇴각했습니다(상하이사변).

 

상하이사변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4월 29일 천황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에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전승 기념 축하식을 열었습니다. 이날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이 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7명의 요인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인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이 호전됐고,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관내 지역의 정당 통일운동

1929년 좌우합작체인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는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라 좌파가 이탈하자 해체를 선언했습니다. 이후 좌파는 상하이에 있던 한인을 중심으로 1929년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우파는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을 주축으로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했습니다. 조소앙이 기초한 당의에 따르면, 한국독립당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내세웠고, 당강에서는 참정권, 국민생활권, 수학권의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1931년 임시정부는 스스로 '한국독립당의 표현기관'이라고 명명해,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조직됐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독립당은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연이은 의거로 임시정부 요인들 대부분이 상하이를 떠나 피신하면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만주와 중국 관내에는 한국독립당 외에도 여러 정당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남만주에서는 1929년 현익철, 최동오 등이 주도하는 조선혁명당이 결성됐습니다. 북만주에서는 1930년 홍진, 지청천, 신숙 등에 의해 재만한국독립당이 창당됐습니다. 1932년 난징에서는 윤기섭(1887~1959), 신익희(1894~1956) 등이 한국혁명당을 창당했습니다. 1933년 중국 관내로 들어온 재만한국독립당은 한국혁명당과 합당해 1934년 신한독립당을 결성했습니다.

 

한편 1932년 상하이 지역 민족운동단체들은 만주사변 이후 정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단체 연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한국독립당, 한국광복동지회,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의열단의 대표들이 모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습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1934년에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민족단일당을 결성해 민족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삼자고 결정했습니다. 한국독립당에서는 김구 등 임시정부 옹호 세력이 반대했으나 다수는 단일당 참여를 찬성했습니다. 그리하여 1935년 7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참가 단체인 한국독립당(김두봉, 조소앙), 의열단(김원봉, 윤세주), 조선혁명당(최동오, 김학규), 신한독립당(지청천, 윤기섭), 대한독 립당(김규식) 등과 미주 지역 4개 단체 등 9개의 정당 및 단체가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당의에서 "국토의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해 국민 전체의 생활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서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로써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의 후원을 받는 최대 정당이 됐습니다.

 

하지만 결성 직후부터 조소앙, 홍진 등은 김원봉의 당권 장악에 불만을 품고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해 1935년 9월 재건한국독립당을 창당했습니다. 지청천을 비롯한 신한독립당 계열도 김원봉과 갈등하다가 탈당해 1937년 조선혁명당을 곁성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은 한국독립당원들은 임시정부의 여당 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했습니다.

 

만주의 유격대와 무장활동

1930년 코민테른의 일국 일당 원칙에 따라 만주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산하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합류해 활동하게 됐습니다. 1931년 4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당원의 96% 이상, 공산주의청년단의 90% 이상이 한인이었습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적극 항전을 주장하며 적위대와 유격대를 조직하도록 했습니다. 남만주에서 창건된 적위대는 만주 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끈 첫 무장조직으로서, 적위대 대장 이홍광을 비롯해 청년 7명이 모두 한인이었습니다. 적위대는 규모를 늘려 200여 명의 남만유격대로 개편됐는데, 그중 4분의 1이 한인이었습니다. 동만주 지역에서는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 등지에서 유격대가 조직됐습니다. 이 4개 지역 유격대들은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동만주에서 일어난 민생단 사건으로 유격투쟁은 크게 위축됐습니다. 남만주에서는 1933년 기존의 유격대를 모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건립했습니다.

 

1935년 8월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에게 국공내전 중지와 항일 민족 통일전선의 결성을 제안하자, 이듬해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습니다. 1936년 1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한인이 많았던 제1군 제6사(사장 김일성)는 1937년 6월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를 습격해 주재소 등을 파괴했습니다(보천보전투).

 

1935년 8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 지원과 반파시즘 통일전선 결성 방침이 정해지자, 중국공산당은 민족운동을 이끌어갈 통일전선 조직체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같은 공산주의 진영의 움직임에 따라 1936년 재만한인조국광복회가 조직됐습니다.

 

조국광복회는 "전 민족의 계급, 성별, 지위, 당파, 연령, 종교 등의 차이를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반드시 일치단결 궐기"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조국광복회는 백두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조직을 넓혀 압록강 북쪽 장백현 일대와 함경남도 북부 및 평안북도 북부 지방, 그리고 함흥, 원산, 흥남 등지에도 지부를 만들었습니다. 1937년에는 국내 사회주의자들과 연계해 국내 조직인 한인 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존재가 알려지면서 관련자 739명이 체포되는 혜산 사건으로 조국광복회는 와해됐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