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일본은 1932년 만주국을 세운 이후 워싱턴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차례로 탈퇴하면서 영국과 미국에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일본은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형성된 전후체제를 흔들며 전체주의적 행보를 걷던 독일, 이탈리아와 가까워졌습니다. 1933년 독일에 들어선 나치 정권은 1936년 재무장을 선포했고, 이탈리아는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습니다. 일본은 1936년 독일과 방공협정을 체결했습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이탈리아가 방공협정에 가입했습니다.
1937년 7월에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중일전쟁은 일본군 병사 한 명이 베이징의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실종된 사건을 빌미로 발발했습니다. 일본군 병사는 귀환했으나 일본군이 중국군에 포격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졌습니다. 곧 쌍방 부대가 정전에 합의했음에도 일본 정부는 중국 화북 지역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1937년 7월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해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했습니다.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8 년간 긴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고 이듬해 봄에 체코를 점령한 뒤 9월에는 폴란드를 기습했습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즉각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방공협정에 기반한 협력을 강화하면서 미국,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일본이 194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군하자 미국은 자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도 전면 금지했습니다. 이에 12월 일본 함대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하는 동시에 군대를 영국령 말레이반도에 상륙시켰습니다. 일본 천황은 즉각 미국과 영국에 대한 개전을 선포했고 다음 날 미국과 영국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동아시아는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습니다.
국내 민족운동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국내 민족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은 조선공산당 재건운 동을 전개한 경성콤그룹이었습니다. 경성콤그룹은 이재유 그룹의 이관술, 김삼룡을 중심으로 1939년 4월 지도부를 형성했고, 1940년 2월 출옥한 박헌영을 지도자로 삼아 공식 결성됐습니다. ML-이재유파, 서울상해파, 화요파 등 각 분파를 망라했으며 끝까지 사상 전향을 하지 않은 인물들로 구성됐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주로 함경도와 경상남도에 기반을 두고, 서울, 부산과 함경북도 등지에 노동운동 조직인 공장반을,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에는 혁명적 농민조합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간행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을 제외한 지도적인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경성콤그룹은 사실상 와해됐습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도 공산당 재건운동이 이어졌습니다. 서울의 공산주의자협의회, 함경도의 자유와독립그룹이 대표 조직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서울에 거주하던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성했고, 용산철도국 등 경인 지역 노동자 사이에서 조직을 형성했습니다.
자유와독립그룹은 함경북도 청진의 일본제철소를 거점으로 함경남북도 일대의 노동운동에 깊이 개입해 활동했으며, 기관지 자유와 독립을 발간했습니다.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여운형(1886~1947)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건국동맹이 서울에서 결성됐습니다. 조선건국동맹은 패망하는 일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고 건국을 준비할 주체 세력을 조직적으로 편성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에 조선건국동맹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엄격히 제외하고, 민족적 양심이 있는 인사를 망라해 공장, 회사, 학교 대중단체에 세포조직을 두기로 결정한 후에 10개도 책임자를 임명하고 지방조직을 갖춰갔습니다.
중국 관내 좌우합작운동과 임시정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관내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중국 측과 본격적으로 연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민족운동 세력을 결집해갔습니다. 1937년에 우파 세력인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와 지지를 표방한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전선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세 정당과 한인애국단, 미주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한인단합회,• 대한인부인구제회, 대한인동지회 등 9개 단체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했습니다. 좌파 세력은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결집했습니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아나키스트 그룹인 조선혁명자연맹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습니다. 이듬해인 1938년에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습니다.
1938년부터 중국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의 요구에 따라 한국광복운동 단체연합회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합하자는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두 사람 명의로 '중국 관내 혁명 단체를 모두 해소하고 공동 정강에 기초한 단일한 조직, 즉 하나의 정당으로 재편돼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공동선언을 발판으로 1939년 8월 7당 통일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산하 3개 단체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은 개인별로 참가하는 단일 정당 방식을 주장한 반면,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은 단체별로 참가하는 연합체 구성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단체별 참가를 주장한 두 단체가 빠지면서 5당 회의가 계속됐습니다. 통합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그해 9월 마침내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하는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5당 회의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 회 측과 조선민족전선연맹 측이 최고권력기관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할 것인가, 당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을 거듭하다 결국 결렬됐습니다. 재건한국독립당의 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지청천, 한국국민당의 김구 등은 3당의 해체를 선언하고 1940년 다시 한국독립당이라는 이름의 임시정부 여당을 창당했습니다.
중국 관내 우파 세력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가운데 좌파 세력을 이끌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분열됐습니다. 김원봉의 노선에 비판적이던 한빈은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 세력을 규합해 1940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최창익 등은 중국공산당 팔로군 지역인 옌안으로 이동해 1941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전한 후 1940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총 42조의 ‘대한민국임시약헌’은 의원내각제의 집단지도제제 대신 주석 중심의 집단지도체제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주석은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했지만 국가원수 및 국군통수권자로서 강력한 영도력을 갖게 됐습니다. 김구가 주석에 선출되면서 이후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체제로 운영됐습니다.
1941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 승인문제 해결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인 민족운동에 대한 지원 창구를 임시정부로 단일화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그해 12월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좌파 세력을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좌파 세력의 임시정부 참여 방식을 놓고 임시정부와 좌파 세력이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임시정부는 먼저 군사통일을 한 후에 정치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한 반면, 좌파 세력은 정치통일을 한 후에 군사통일을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관할하던 중국군사위원회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통합할 것을 명령하고,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에 임명하면서 군사 통일이 먼저 이뤄졌습니다.
정치통일은 임시정부가 1942년 8월 좌파 세력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임시의정원의원 선거규정’을 만들어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키면서 본격화됐습니다. 이에 따라 1942년 10월에 실시된 임시의정원 의원 보궐선거에서 기존의 23명 외에 새로 23명의 의원이 선출됐습니다. 23명을 당적별로 보면 한국독립당 소속 7명, 조선민족혁명당 12명,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 자연맹이 각각 2명씩이었습니다. 한국독립당 당선자를 제외한 16명이 좌파 인사였습니다. 임시정부가 좌우연합 정부로 꾸려진 것이습니다. 1944년 4월 제36차 의정원회의가 개최될 때는 여야도 세력 균형을 이뤘습니다.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했습니다. 주석 김구는 한국독립당, 부주석 김규식은 조선민족혁명당 소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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