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개항기13 일본의 한국병합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의병탄압으로 한국병합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한 이토는 만주시찰에 나섭니다. 러시아 정부의 대표인 재무대신 코코프쵸프(V.N. Kokovtsor)를 만나 만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미국에 공동 대응할 방안을 모색하고 한국병합에 대해 러시아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토는 10월 26일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안중근에게 사살당하고 맙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는데 일본 내에서는 즉각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우익 낭인 우치다 료헤이로부터 지시받은 일진회는 12월 「합방청원서」를 작성해 한국 정부와 통감부에 제출했으며, 「합방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합니다. 이토 사망을 계기로 한국병합이 즉각적으로 실행될 것 같은 분위기가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 2023. 2. 27. 한국병합을 위한 일본의 준비작업 치밀하게 준비된 일본의 한국병합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한일신협약」(정미조약)이 체결된 이래 통감은 명실공히 한국의 내외정을 총괄하는 최고 통치자가 됩니다. 한국 국정의 주요 사항은 통감이 주도하고 한국 정부의 대신, 일본인 차관, 그리고 통감부 관리가 참석하는 시정개선협의회에서 논의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한국의 군대는 황궁 경호를 위한 친위부 700여 명 외에 모두 해산됐고, 명목상으로만 남아 있던 군부도 1909년 7월 31일 폐지됩니다. 경찰은 일본군 헌병대를 주축으로 개편해버립니다. 1908년 5월 한국의 경찰기관을 한국 주차 일본 군사령관이 지휘하도록 하고, 7월 1일부터 해산된 한국 군인이나 면직된 순사를 헌병보조원으로 채용해 일본 헌병 1인당 2~3명을 배속시킵니다. 190.. 2023. 2. 27. 의병투쟁과 의열투쟁 의열투쟁의 전개 민권운동이나 계몽운동과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침략에 맞서 직접 항거하는 민족운동도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의열투쟁과 '의병투쟁'으로 구분되는데, 의열투쟁은 국가에 대한 충절을 지켜 자신의 죽음으로 항거하는 '순절'과 개인 혹은 소수의 결사로 침략의 당사자나 이에 협조한 한국인을 무력으로 응징하는 '의거'를 함께 지칭합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생과 전직 관료들의 반대하는 목소리와 함께 이완용, 박제순 등 이른바 '을사5적'의 주살을 주장하는 상소가 쇄도합니다. 상소로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전 참판 홍만식을 시작으로 시종무관장 민영환, 전 의정대신 조병세 등 많은 사람들이 순절로 이에 항거했고 이는 전국적으로 배일 감정을 크게 자극하게 됩니다. 1907년 7월.. 2023. 2. 27. 애국계몽운동과 국학운동 애국계몽운동의 대두 러일전쟁과 일본군의 주둔으로 고종의 황제권이 위축되기 시작하자 한국도일본과 같이 국정을 개혁해 근대 국민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이 시기는 국가의 독립이 위협받는 상황이었기에 민권운동에서도 이전의 독립협회운동과 달리 민권보다 국권을 강조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겼기에 애국계몽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근대교육을 받은 신지식인들은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한 근본 원인이 한국의 실력이 부족한 데서 비롯됐다고 인식했습니다. 이들은 문명개화론, 사회진화론 등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교육과 산업진흥으로 국가 발전의 토대를 세우.. 2023. 2. 26.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