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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준비와 새로운 사회 건설 구상 한중일의 반제 연대활동 식민지기 내내 동아시아에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며 한중일 간 국제 연대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중국으로 망명했던 민족운동가들은 1911년의 신해혁명이 이룬 성공에 고무됐습니다. 김규흥 등은 직접 신해혁명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밀해진 천치메이, 후한 민 등의 중국 혁명파 지도자들과 신규식, 조소앙 등의 민족운동가들이 1912년 반제국주의를 지향하는 연대조직인 신아동제사를 결성했습니다. 또한 조소앙은 신아동제사와 별도로 천궈푸, 창지 등과 함께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당을 결성했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중국 각지에서 한중호조사가, 광저우에서는 중한협회가 결성됐습니다. 중한협회는 1921년 11월에 열린 워싱턴회의와 중국 각계에 선언서 등을 보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 2023. 6. 8.
무장단체의 반일투쟁과 민족운동 세력의 연대 반일투쟁에 나선 무장단체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 좌우합작단체의 결성과 함께 무장단체를 결성해 반일투쟁에 나서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졌습니다. 중국 관내 지역 최초로 결성된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의 대원 일부가 김원봉과 노선을 달리하며 1941년 중국공산당 관할 지역으로 이동해 조선의용대 화복지대를 결성했습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타이항산 일대에서 호가장 전투를 비롯해 여러 전투를 치렀습니다. 조선의용대 화복지대는 1942년 무정(본명 김무정)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됐습니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에서 적진 침투와 병사 모집, 그리고 선전, 첩보활동을 펼쳤습니다. 만주에서는 한인들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최대 3만여 명에 달하던 동북항일연군.. 2023. 6. 7.
전쟁의 확대와 통일전선운동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일본은 1932년 만주국을 세운 이후 워싱턴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차례로 탈퇴하면서 영국과 미국에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일본은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형성된 전후체제를 흔들며 전체주의적 행보를 걷던 독일, 이탈리아와 가까워졌습니다. 1933년 독일에 들어선 나치 정권은 1936년 재무장을 선포했고, 이탈리아는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습니다. 일본은 1936년 독일과 방공협정을 체결했습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이탈리아가 방공협정에 가입했습니다. 1937년 7월에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중일전쟁은 일본군 병사 한 명이 베이징의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실종된 사건을 빌미로 발발.. 2023. 6. 6.
1930년대 민족 운동(한인애국단, 정당 통일 운동, 항일 유격대) 한인애국단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습니다(만보산사건). 국내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한인이 입은 피해가 과장 보도되면서 중국인 100여 명이 학살되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중국인들은 크게 격앙했고 양국인 간 감정이 악화됐습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도 이로부터 2개월 뒤였습니다.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인의 반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항일 거사를 일으키자고 결의하며 내무총장인 김구(1876-1949)에게 실행을 일임했습니다. 김구는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차 거사로 이봉창 의거를 준비했습니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다가 상하이로 건너온 노동자였는데, 그곳에서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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