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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7

친일파의 육성 한국 강제병합과 초기 친일협력 세력 1910년대 식민지배는 헌병경찰 등과 같은 강압적인 수단에 크게 의존했지만, 일본의 통치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 문화 전통과 1,7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한국을 일본의 물리력과 행정조직만으로 통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부족한 통치력을 뒷받침하고, 민족적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협력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침략 초기부터 친일협력 세력을 육성하고, 포섭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러일전쟁 이후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자, 일제의 한국 침략에 영합하는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대두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완용 등 친일 고위 관료들은 일신의 안위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의 을사조약 강요와 한국 강제병합에 협력했습니다. 친일단.. 2023. 3. 10.
강제 동원된 사람과 물자 미곡증산계획의 부활 1934년부터 중단됐던 산미증산정책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식량 수요가 늘면서 미곡증산계획(1939)으로 부활하기 시작합니다. 이 계획은 토지개량이 아니라 경종법을 포함한 농사방법 개선에 의존해 빠른 증산을 도모하려 했으나 그해 여름 대가뭄으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농사방법 개선에 중점을 두면서도 토지개량도 병행하는 「조선증미계획」을 1940년부터 실시해 적극적인 미곡증산에 나섭니다. 동시에 전쟁 탓에 자금, 비료, 노동력 투입이 쉽지 않아 쌀의 증산이 여의치 않은 점을 고려해 쌀의 생산과 유통도 직접 통제하고 나섭니다. 그 일환으로 먼저 1940년 「조선미곡배급조정령」을 시행해 그해부터 쌀 공출을 시작합니다. 1943년에는 '부락(마을) 책임 공출제'와 '공출 사전.. 2023. 3. 9.
전쟁 총동원체제와 통제경제 일제의 도발과 전쟁 확대 1931년 일제는 중국 동북 지역을 침략한 뒤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유럽 열강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이후 대규모의 침략전쟁과 전시경제를 통해 팽창을 계속해나갔습니다. 전쟁이 확대되자 조선도 전시공업체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1936년 10월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산업경제조사회에서 조선의 공업도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진흥시켜야 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전까지 일본에만 적용하던 「중요산업통제법」을 1937년부터 조선에도 적용하기로 합니다. 산업 발전이 뒤처진 조선의 상공업을 보호하기 위해 「중요산업통제법」 적용을 유예하자는 주장은 전시 통제의 필요성에 의해 밀려난 것입니다. 1937년 7월 일본은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자금과 노동력, 자원 모두를 군수산업에.. 2023. 3. 8.
식민지배체제의 강화 식민지 경제정책 일제는 문화통치로 전략을 전환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부분에서 식민지배체제를 개편해 나갑니다.. 먼저 경제면에서는 1920년 「조선회사령」을 폐지해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전시 호황으로 자본을 축적한 일본 기업이 자유롭게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값싼 조선 쌀을 일본 시장에 공급해 일본 미곡시장의 수급 불안정성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합니다. 정치사회적 탄압정책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부분적으로 허용했지만, 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교묘해집니다. 민족운동이 성장, 확대될수록 이를 분열, 약화시키려는 시도도 강화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특히 급성장하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훨씬 강경한 억압책을 ..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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