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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3

서양국가와의 조약 체결 조선책략의 유입과 대미 조약 체결 여론의 대두 1880년 5월 조선 정부는 일본의 무관세 무역 및 쌀 수출에 따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수신사 김홍집(1842~1896)을 일본으로 파견합니. 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김홍집이 전권이 없다는 이유로 교섭 자체를 거부해버립니다. 그냥 돌아갈 수 없었던 김홍집은 도쿄 주재 청국공사 허루장을 찾아가 근대적 관세제도를 논하고, 러시아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따른 대책을 상의합니다. 여기에서 허루장은 조선의 관세자주권 확보를 강조하며, 러시아 침략에 대한 대책으로 균세정책에 입각한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을 제안합니다. 특히 그는 서구 열강 중에서 미국과 가장 먼저 체결할 것을 권유했는데, 미국이 일본의 조약 개정안을 조건부로 수락(미일관세개정약서)한 유일한 서구 열강이.. 2023. 2. 21.
개항과 불평등조약 메이지 유신과 정한론의 대두 1868년 일본은 천황 중심의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합니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조선 정부에 이를 알리는 외교문서(서계)를 보냅니다. 여기에는 에전과 달리 '황', '칙' 등의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조선에서 '황', '칙'은 청 황제를 상징합니다. 때문에 조선 정부의 대일 외교를 담당한 동래부에서는 문서 형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계 접수를 거부하게 됩니다. 이는 조선과 일본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는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서 교섭을 시도하겠다고 하고, 만약 교섭이 결렬되면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는 내치우선론을 주장하면서 사이고의 정한론을 반대합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이와.. 2023. 2. 21.
서구의 침략과 중화질서의 재편 영국의 아편무역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전후였습니다. 청은 서구 상인의 무역활동 지역을 광저우로 한정했고, 특별히 허가받은 공행만 제한적으로 허가했습니다. 여국은 무역 확대를 목적으로 청에 개항을 요구합니다. 이는 차의 수입 증가에 따른 대청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청이 영국의 요구를 거부하자, 영국은 인도를 통해 청에 아편을 수출했고, 그 결과 청은 은화 유출에 따른 무역적자와 아편 중독자의 급증에 따른 사회적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1차 아편전쟁의 발발 1839년 청 정부는 황제의 명령으로 흠차 대신 임칙서(린쩌쉬)를 광저우에 보냅니다. 임칙서는 아편을 몰수하고 아편의 매매을 엄격히 금합니다. 영국은 1840년 이를 빌미로 함대를 청으로..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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