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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2

청일의 대립과 청일전쟁의 발발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 출병 1894년 6월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확대되자, 청과 일본 양국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간주하면서 내정에 직접 개입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초토사 홍계훈 휘하의 장위영 병정들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하자, 6월 3일 밤 조선 정부는 당시 정권 실세였던 민영준의 주도 아래 청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게 됩니다. 일본은 1884년 잡신정변을 둘러싸고 청과 군사적 충돌의 위기를 겪었지만, 양국은 조선과 관련된 일에 직접 개입할 때 상호 통지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톈진조약(1885)을 맺고 청과 외교적으로 타협했습니다. 이후 일본은 군사력을 키워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고, 1894년에는 일본의 조선 진.. 2023. 2. 22.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농민군이 해산했음에도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본군은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조정에서는 민씨 척족 정권이 몰락하고 개혁적 관료가 중심이 되는 갑오 정권이 들어섭니다. 정권에서 소외된 흥선대원군은 전봉준에게 밀서를 보내 봉기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농민군을 이용해 갑오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한편 일본 낭인들은 일본군의 동학 진압 빌미를 찾기 위해 전봉준과 동학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동학농민군 사이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직후부터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지도부는 농민군의 세력을 확장하고 군량미와 무기를 확충하며, 농민군의 안..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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