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결사운동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이라는 두 흐름으로 전개됐고, 이 흐름은 1910년대 비밀결사운동으로 계승됐습니다.
의병운동 계열의 비밀결사로는 '대한독립의군부', '풍기 광복단' 등이 있었습니다. 이 단체들은 대한제국기 의병전쟁의 맥을 이어 친일 부호를 응징하는 등 폭력투쟁도 불사했으며, 왕정 회복이 목표인 복벽주의를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1912년 의병장 출신인 임병찬(1851~1916)이 고종의 밀칙을 받아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1914년 5월 군자금 모집활동이 발각돼 무너졌습니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 경북 풍기에 거주하던 채기중(1873~1921)의 주도로 10여 명이 조직했는데, 부호를 상대로 한 군자금 모집에 주력했습니다.
계몽운동 계열의 비밀결사로는 조선국권회복단, 조선 국민회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시회, 종교 교육활동을 표방하면서 동지 규합,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 거점 확보 등을 추진했습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대구에서 서상일(1887~1962), 박상진(1884~1921)이 국내 세력을 확장하고 해외의 민족운동 세력과 연대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었습니다. 대구의 상덕태상회, 태궁상점, 부산의 백산상회 등을 운영해 연락망을 구축하고 잡화나 곡물을 팔아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조직과 인적 구성이 치밀한 단체였지만 1919년 6월경에 발각됐습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장인환(1886~1918)의 주도로 평양에서 결성됐습니다. 미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정세 인식에 기반해 무장 독립전쟁을 모색했습니다. 1918년 2월 조직이 발각될 때까지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고, 무기 구매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1915년에는 의병운동 계열의 풍기광복단과 계몽운동 계열의 조선국권회복단이 연대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습니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 대에 활동한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 중 규모가 가장 컸습니다. 회원 대부분은 양반, 유생 출신이었으나, 공화주의를 이념으로 잡았습니다. 박상진이 총사령으로서 조직을 관리했고, 상덕태상회가 본부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이라는 4대 강령하에 독립군 양성과 무기 구입 등을 도모했습니다. 이를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비협조적인 친일 부호를 처단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상진 등이 체포되면서 1918년에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의병운동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 나아가 두 흐름의 연대 속에 추진된 국내 비밀결사운동은 주로 해외 독립운동 기지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1910년대 민족운동 세력은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해 독립전쟁을 준비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독립전쟁론'이라 합니다. 국망 전후 민족 운동가들은 이미 한인사회가 형성돼 있던 서, 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한인의 집단 이주를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관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은 한인사회의 자치권을 확보하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민족운동 단체들은 한인사회의 경제적 안정과 정치적 자치를 도모하면서 계몽운동과 민족교육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북간도에서는 1910년 간민회가 결성됐습니다. 간민회는 청 관리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활동하며 북간도 각지에 지회를 뒀습니다. 한인으로부터 교육 회비를 걷고, 김약연(1868~1942)이 교장을 맡아 명동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중국 혁명정부의 지지를 얻어 자치기관의 위상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철폐 명령을 내림으로써 1914년 해산됐습니다.
서간도에서는 1910년에 망명한 이회영(1867~1932), 이상룡(1858 ~1932) 등이 독립운동 기지를 경영하기 위해 1911년 경학사를 설립했습니다. 1912년에는 경학사를 대신한 부민단이 결성됐습니다. 부민단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부여의 유민이 다시 일어나 결성한 단체라는 것이 습니다. 중앙 부서와 지방조직을 결성해 한인 자치를 담당했고,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부민단은 1919년 3.1 운동 이후 결성된 한족회로 흡수됐습니다.
연해주에서는 1910년 국망 직전에 유인석 등이 국내외 의병부대를 하나로 묶고자 13도의군을 창설했습니다. 191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를 창립해 연해주 일대에 사는 한인들을 모으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권업회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자치기관으로 인정받아 한인 관련 행정 사무를 맡았으나, 1914년 러시아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됐습니다.
미국에서는 1910년에 대한인국민회가 발족돼 미국 한인 사회 최고기관으로서 자치 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했습니다. 1912년에는 조직을 확대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공식 출범시켰습니다.
임시정부 수립운동
국망을 계기로 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를 통해 가장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1910년 9월과 10월에 발표한 여러 논설에서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 역할을 하자고 밝혔습니다. 대한인국민회가 한국인을 대표해 입법, 행정, 사법의 3대 기관을 두고 완전한 자치기관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11년에 들어서는 신한민보 주필 박용만(1891-1920)이 ‘무형 국가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1912년 11월에 열린 중앙회에서 대한인국민회는 스스로 해외 한인을 대표하는 무형의 정부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형식상 대한제국은 이미 망했으나 정신상 민주주의 국가는 이제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중앙회, 지방회, 지방회로 구성하였습니다.
당시 지방총회는 미국,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등에 있었습니다. 1917년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1880~1922), 박은식(1859~1925), 신채호(1880~1936), 조소앙(1887~1958) 등 14명 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에서는 해외 여러 단체의 대표자가 모이는 대회를 열어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임시정부를 건설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대헌, 즉 헌법을 제정해 민정에 부합하는 법치를 실행하고, 왕이 없는 공화정에 기반한 임시정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대동단결선언」은 복벽주의를 불식하고 공화주의를 민족운동의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919년 2월 연해주의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130여 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임시 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대한국민의회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회의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916년 파리에서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독립투쟁을 벌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의 승인을 받아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국민의회는 3.1 운동이 한창이던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 출범했습니다.
'역사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군의 무장투쟁과 의열단 (0) | 2023.05.31 |
---|---|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 | 2023.05.30 |
일기예보의 역사 (0) | 2023.03.24 |
점성술의 역사 (0) | 2023.03.23 |
은행의 역사 (1) | 2023.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