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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by 우공 박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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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준비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이, 1918년 미국에서 윌슨이 민족자결을 주창했습니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된 데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일제의 무단통치로 고통받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과 청년, 학생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개조와 평화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됐습니다. 사흘 후인 1월 21일 식민지 조선에서는 고종이 급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식인과 청년, 학생은 이를 계기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운동을 모의했습니다. 2월 8일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도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큰 자극이 됐습니다.

 

먼저 종교계가 움직였습니다.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은 만세시위를 계획했습니다. 만세 시위운동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이라는 3대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평양의 기독교계 지도자들도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중 천도교계로부터 연락을 받고 이승훈(1864~1930)을 서울로 파견했습니다.

이에 2월 24일 천도교계와 기독교계는 만세시위를 함께 벌이는 데 합의했습니다. 이어 불교계의 지도자였던 한용운(1879~1944) 등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유림과의 연합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도 1919년 1월부터 독립운동을 논의한 끝에 3월 5일 학생시위를 일으 키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종교계가 3월 1일에 시위를 벌일 계획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동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3월 1일 만세시위에서 발표할 「독립선언서」는 최남선( 1890~1957)이 작성했습니다. 「독립선언서」에는 기독교계 16명, 천도교계 15명, 불교계 2명 등 모두 33인이 서명했습니다.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계가 담당했고, 배포는 학생들이 서울을,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지방을 맡았습니다.

 

 

독립의 함성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3단계로 나뉩니다. 제1단계는 3월 상순의 발발 단계입니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29인이 참석해 독립선언식을 가졌습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열고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날 정오 이후부터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북부 지방도시에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첫날 지방시위는 서울과 사전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됐습니다.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학생들이 준비한 만세시위가 만여 명 이 참가한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3월 상순의 만세시위는 주로 북부 지방, 부청, 군청소재지, 교통 편리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제2단계는 3월 중순의 확산 단계입니다. 이 시기 만세시위는 지식인, 청년, 학생은 물론 노동자와 상인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됐습니다. 동시에 주로 중 남부 지방, 면 단위 이하 농촌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5일마다 열리는 장날이 농촌시위의 주요 무대였습니다. 종교는 물론 계급, 계층 간, 지역별 연대시위도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각종 비밀결사, 결사대가 조직돼 시위를 준비하고 주도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3단계는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 민중의 진출 단계입니다. 3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노동자대회에는 많은 노동자가 참여해 만세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이후 매일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고, 26일과 27일에는 전차 종업원과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시위가 다소 폭력화되는 양상을 보였는데, 발포 등 과잉 진압에 맞선 정당방위 성격의 폭력투쟁이 주를 이룹니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사망자도 늘었습니다. 수원 제암리에서 20명의 주민이 살해된 제암리 학살 사건도 이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만세시위는 4월 10일을 전후해 차츰 찾아들었지만 5월 말까지 계속됐습니다.

 

국외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부민단이 주도하는 독립축하회와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인 13일에는 북간도의 용정에서 1만여 명의 한인들이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벌였습니다. 17일에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한인들이 만세 행진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인들이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 집결해 한인자유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식과 시가행진을 가졌습니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민족운동의 분수령

3.1운동은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닌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3.1운동에서 한국인은 신분, 계급, 지역, 종교 등의 차이를 넘어 하나로 모였고, 이 경험은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3.1운동에서 활약했던 지식인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은 여러 단체를 만들어 대중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3.1운동은 대외적으로는 반일 독립운동이고 대내적으로는 민주주의운동이었습니다. 곳곳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민족의 자주와 자격, 인류의 평등과 평화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여러 곳에서 내놓은 임시정부안 역시 군주가 없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 공화정을 요구했습니다.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의지는 조선총독부가 통치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아시아에서는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됐습니다. 3.1 운동은 중국에서 지식인과 학생이 주도한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인 5.4운동,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에서 일어난 민족운동 등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아시아에서 일어난 반제국주의 저항운동의 선구였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3.1운동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 운동도 본격화됐습니다. 천도교는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돼 임시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거나 임시정부안을 담은 전단이 뿌려졌습니다. 한결같이 공화제 정부를 지향했다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3월 중순이었습니다. 천도교계, 기독교계, 유교계, 불교계 인사들이 회합해 민주제와 대의제를 따르는 정부 수립을 명시한 「임시정부 약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부 각료를 선출했는데, 집정관 총재는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1873~ 1935)가 됐습니다. 또한 4월 2일에 인천 만국공원(현재의 자유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임시정부를 선포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아쉽게도 13도 대표자회의는 성원 부족으로 좌절됐습니다. 그러나 4월 23일에 한성 정부 수립을 알리는 전단이 뿌려졌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준비됐습니다. 3.1운동을 준비하던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인사들은 상하이에 현순(1880~1968)을 파견했습니다. 현순은 프랑스 조계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열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논의 끝에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마침내 4월 11일 각 지방 대표가 모여 의회인 임시의정원을 구성합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국이라는 연호를 제정했습니다. '대한'에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잇는다는 뜻을, 민국에는 황제가 아닌 민의 나라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관제를 정하고 국무원도 구성했는데, 국무총리에는 이승만이 선출됐습니다. 민주 공화정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임시헌장」도 반포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국내에서 나온 한성정부안을 수용한 임시정부 통합이 추진됐습니다. 통합의 주역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안창호(1878~1938)였습니다. 그는 임시정부 통합 방안으로 한성정부의 내각 명단을 활용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기로 했습니다. 임시의정원은 9월 6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제정하고 한성정부안 명단에 따라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내각을 선출했습니다. 임시 의정원에는 김마리아(1892~1944)를 비롯한 여성 의원도 선출돼 활약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닥친 고난

1919년 파리강화회의 기간에 탄생한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규식(1882~1931)을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부 대표에 임명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외교활동을 벌였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독립운동 진영을 지도할 목적으로 기관지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9월에는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한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했습니다. 사료집 편찬에는 독립신문사 사장인 이광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시교통국을 설치하고 연통제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3월 이승만이 미국에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한국을 통치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위임통치 청원) 임시정부 비판 세력이 베이징을 중심으로 등장했습니다. 논란의 중심에는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싼 갈등이 자리했습니다. 이승만이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는 외교 운동보다 독립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습니다. 안창호는 외교나 독립운동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실력양성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이동휘는 이승만과 갈등을 겪다가 1921년 1월 국무총리직을 사직하고 임시정부를 떠났습니다. 1920년 말 상하이에 왔던 이승만 역시 반 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독립운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다가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지도자들 사이에 반복과 대립이 이어지자, 1921년경부터 임시정부는 어려움이 직면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임시정부의 활동력이 떨어지면서 국내와의 연결고리였던 임시교통국과 연통제도 무너져갔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했습니다. 1923년 1월 지역 대표와 단체 대표로 인정된 130여 명이 상하이에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열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재편 방안과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한 이 대회는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로 4개월 정도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회의 과정에서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신채호 등의 창조파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대로 두고 조직만 개조하자는 안창호 등의 개조파로 분열되면서 국민대표회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료하고 말았습니다. 임시의정원은 국민대표회의가 진행 중이던 1923년 4월에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했습니다. 1925년 3월 23일에는 이승만을 탄핵 면직하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이러한 혼란과 분열을 겪으며 임시정부는 침체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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