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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사회주의 수용과 조선공산당

by 우공 박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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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의 수용과 공산주의 그룹

사회주의 사상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는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기독교 사회주의 등과 같이 매우 다양한 조류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3.1 운동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점차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에는 식민지 피압박 민족에 대한 소비에트 러시아 및 국제 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Comintern)의 지원과 일본 사회주의 운동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운동은 해외에서 태동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신학문을 수용하기 위해 건너간 재일 유학생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가운데 김철수(1893~1986), 장덕수(1894~1947) 등으로 구성된 김철수 그룹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이 그룹은 1916년 도쿄에서 조선,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들로 비밀리에 조직된 신아동맹당의 참가자들로 구성됐습니다. 1920년에 국내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국내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해 사회혁명당을 조직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1910년대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운동을 전개한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해 활동했습니다. 이동휘(1873~1935), 김립(?~1922) 등은 1918년 5월 하바롭스크(Khabatorst)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1919년 8월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본거지를 상하이로 이전했습니다.

 

1921년 5월에는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 등이 연합해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식민지 조선과 일본, 중국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을 망라한 이른바 상해파 고려공산당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이르쿠츠크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귀화 한인들과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김만겸, 안병찬 등 한인사회당 반대 그룹이 결합해 고려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탄생이었습니다.

 

코민테른은 각 나라나 지역마다 지부를 한 곳만 인정했습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코민테른의 배타적 지부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했습니다. 상해파는 먼저 민족해방을 수행한 뒤에 그 결과를 토대로 연이어 사회주의혁명을 도모한다는 연속혁명론을 지지했습니다.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동시 병행한다는 즉각적 사회주의 혁명론을 지지했습니다.

 

3.1 운동 이후 대중운동단체가 속속 등장했는데, 그 이면에는 몇 개의 공산주의 그룹이 비밀결사의 형태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그룹들은 대중운동단체를 조직하는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선전에 주력했습니다. 공산주의 그룹들은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지배받는 자본주의사회이며, 제국주의 일본도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건설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해방의 이데올로기로 여긴 것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까지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한 국내 상해파는 당면 학명을 민족혁명 단계로 설정하고, 민족주의 세력과 통일전선 결성에 주력했습니다. 1922년 조선 유림의 원로인 김윤식이 사망하자 민족주의자들은 김윤식 사회장을 추진했습니다. 그즈음 물산장려운동도 본격적으로 추진됐습니다. 국내 상해파는 김윤식 사회장에 찬성하고, 1923년에는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국내의 다른 공산주의 그룹은 국내 상해파의 노선에 반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김윤식 사회장 과정에서 국내 상해파 중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분리해 나갔습니다. 물산장려운동에 대해서도 서울파의 고려공산동맹 등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사회주의운동의 주도권은 새로운 공산주의 그룹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들은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등과 같은 사회주의사상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각각 화요파, 북풍파, 조선노동당파로 불리면서 이후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서울파 등과 함께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조선공산당

1920년대 초반 여러 공산주의 그룹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통일적인 공산당을 조직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두 개의 당이 출현했습니다. 1923년 2월 서울파를 중심으로 고려공산동맹이 조직되고, 1925년 4월 화요파가 중심이 되고 북풍파와 상해파가 참여해 조선공산당(제1차)이 결성된 것이었습니다.

 

고려공산동맹과 조선공산당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서로 코민테른의 지부가 되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은 지도부가 검거됐으나 바로 새로운 지도부를 세웠습니다(제2차 조선공산당). 1926년 3월 코민테른은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을 통해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지부로 최종 승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공산동맹은 조선공산당과 결합해야 한다는 서울 신파와 이 결합에 소극적인 서울 구파로 분열됐습니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탄압으로 궤멸에 가까운 상태에 빠졌습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가운데 검거를 모면한 이는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다양한 공산주의 그룹과 연계를 모색했습니다. 1926년 12월 ML파 주도로 제2차 당대회가 열려 이른바 통일조선공산당이 조직됐습니다(제3차 조선공산당). 통일조선공산당은 통합에 소극적이었던 서울 구파를 포함해 국내외 모든 사회주의운동을 하나의 깃발 아래 모으는데 일단 성공했습니다. 이에 앞서 조선공산당은 1926년 11월 「정우회 선언」을 통해 민족협동전선 조직,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전환, 분파투쟁 청산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방향전환론을 주창했습니다. 이 선언을 계기로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신간회 결성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1927년 서울 구파와 상해파는 ML파의 독단적인 조선공산당 운영을 비판하면서, 1927년 12월 서울의 춘경원에서 비밀리에 자신들만의 제3차 당대회를 개최했습니다(춘경원당). 이른바 서울상해파(약칭 '서상파)의 출현입니다. 반면 조선공산당은 1928년 2월 제3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노동자 출신의 차금봉(1898~1929)을 책임비서로 선출했습니다(제4차 조선공산당). 또다시 출현한 두 개의 공산당은 코민테른에서 자신들의 당대회가 갖는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파쟁을 전개했습니다.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에 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12월태제)를 발표해 한국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12월테제는 지식인의 파벌투쟁을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가장 큰 문제로 규정하고, 지식인의 파벌에서 벗어나 노동자와 농민에 기반을 둔 공산당을 새롭게 조직하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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