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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13

갑오개혁 정부의 붕괴와 대한제국의 수립 삼국간섭과 명성황후 피살 1895년 4월 청일전쟁에 대한 강화회담을 통해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지면서 동아시아 정국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만주에 진출하는 것에 반대해 독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을 가했고, 그 결과 랴오둥반도가 중국에 반환됩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전략도 더 이상 추진되기 어려워졌습니다. 일본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면서 조선 정부도 변화를 맞게 됩니다.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이어 박영효가 주도권을 행사한 박정양 내각이 등장했지만, 박영효가 반역모의 혐의로 축출되면서 보수적인 정부로 교체됩니다. 또한 그간 진행된 급격한 개혁으로 지방의 이서, 군인 등이 개혁에서 배제되고 일자리를 잃으면서 불만이 쌓였고, 일부 관리와 지방 유생 등.. 2023. 2. 23.
군국기무처의 수립과 갑오개혁 추진 1차 갑오개혁의 추진 일본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한 이후 조선에는 새 정부가 수립됩니다. 1894년 7월 27일 군국기무처가 창설되고,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하는 갑오개혁 정부가 출범합니다. 군국기무처에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중견 관료와 유길준, 김가진, 김학우 등 소장 개화 관료, 그리고 대원군 계열 일부가 참여했습니다. 총재 1명, 부총재 1명, 그리고 16명에서 20명 미만의 회 의원과 2~3명의 서기관이 참여했으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안건을 처리했습니다. 군국기무처는 여러 사회경제적 사안에 대한 개혁까지 맡았습니다. 중앙 정치기구를 개편하면서 의정부와 궁내부를 분리하고, 궁내부 산하의 여러 기구를 통폐합해 왕실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제한합니다. 또한 의정부 아래 내무, 외무, 탁지, .. 2023. 2. 22.
청일의 대립과 청일전쟁의 발발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 출병 1894년 6월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확대되자, 청과 일본 양국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간주하면서 내정에 직접 개입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초토사 홍계훈 휘하의 장위영 병정들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하자, 6월 3일 밤 조선 정부는 당시 정권 실세였던 민영준의 주도 아래 청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게 됩니다. 일본은 1884년 잡신정변을 둘러싸고 청과 군사적 충돌의 위기를 겪었지만, 양국은 조선과 관련된 일에 직접 개입할 때 상호 통지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톈진조약(1885)을 맺고 청과 외교적으로 타협했습니다. 이후 일본은 군사력을 키워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고, 1894년에는 일본의 조선 진.. 2023. 2. 22.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농민군이 해산했음에도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본군은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조정에서는 민씨 척족 정권이 몰락하고 개혁적 관료가 중심이 되는 갑오 정권이 들어섭니다. 정권에서 소외된 흥선대원군은 전봉준에게 밀서를 보내 봉기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농민군을 이용해 갑오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한편 일본 낭인들은 일본군의 동학 진압 빌미를 찾기 위해 전봉준과 동학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동학농민군 사이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직후부터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지도부는 농민군의 세력을 확장하고 군량미와 무기를 확충하며, 농민군의 안..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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