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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13

통치기구의 이원화와 식산흥업 정책 통치기구의 이원화 대한제국 성립 이후 국가기관의 개편 결과 통치기구는 궁내부와 정부로 이원화되었습니다.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외세와 결탁되어있거나 황제의 명령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전달되어도 시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고종은 늘 자신의 의지대로 국정을 운영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때문에 자신이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황제 직속의 기구인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때문에 고종은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필요한 기구를 신설하거나, 궁내부의 기능을 확대해 주요 정무와 사업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정부기구를 폐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일한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기구가 정부와 궁내부 양쪽에 모두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통치기구를 이원화한 것으로 이.. 2023. 2. 23.
황제권 전제화와 정치 세력 재편 고종의 황제권 강화 정책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 고종 황제는 국내 정치 세력을 상호 견제하면서 군주권을 강화해갑니다. 이는 황제 권력에 도전할 만한 세력은 국외 망명자 세력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고종은 단발령을 폐지하고 음력을 복구합니다. '구본신참'의 국가 운영 기준에서 옛것을 근본으로 한다는 '구본'에 대한 상징적 조치로, 이를 통해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1899년 4월 27일 조서에서는 '충군애국'에 기초한 전통적인 유교 숭상을 강조합니다. 이는 민중을 황제에게 충성하는 신민으로 통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황제의 절대권력을 상징화하는 작업도 추진해나가는데, 같은 해 7월에는 표훈원을 설치해 훈장제도를 창설했고, 10월에는 왕실을 위해 싸우.. 2023. 2. 23.
독립협회와 고종의 갈등 국가운영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을 확립해야 한다는 여러 정치세력의 공통된 문제의식 아래 창립됐지만, 국가운영에 대해서는 서로 생각이 달랐습니다. 황제는 아관파천으로 실추된 군주권을 강화하려 했고, 서재필은 민중 계몽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했으며, 정동구락부 세력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내정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1898년 2월 이후 독립협회가 민권운동과 참정권 획득운동을 전개해가는 동안 황제권력과의 갈등이 표면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고위 관료들이 독립협회에서 탈퇴했고,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노선 대립도 나타났습니다. 윤치호, 이상재 등의 온건파는 관리와 백성의 화합을 표방하며 고종 황제와 협력해 내정 개혁을 이루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안경수,.. 2023. 2. 23.
독립협회의 대중 계몽운동 독립신문의 발간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위한 추진기구로 창립됩니다.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이 그 원동력이었습니다. 아관파천 후 고종은 친일 성향의 김홍집 내각을 해산시키고 친러,친미 성향의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 등 정동구락부 세력을 중심으로 한 내각을 출범시킵니다. 이들은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내정 간섭을 견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상황이 이어져 정치는 안정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정동구락부 내각은 아관파천의 불가피성을 선전하는 동시에 우호적인 여론 조성을 위한 신문 발간을 추진해, 그 책임자로 서재필을 선정합니다. 갑신정변으로 도미했던 서재필은 1895년 12월 미국에서 귀국했습니다. 이후 김홍집 내각의 협력..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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