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물에 대한 관심
19세기 이전부터 조선에는 서양문물을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17세기 중엽에는 연행사가 베이징의 천주당에서 천주교를 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천문과 역학을 배우고, 18세기 후반에는 북학파를 중심으로 서양 문물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일을 논의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은 천주교의 위험성이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서양문물에 대한 태도의 전환
19세기에 이르면, 조선은 이양선이라 불리는 서양 선박의 출몰과 통상 요구, 천주교도의 출현을 계기로 서양을 위험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조선 집권층은 천주교를 왕조의 통치이념인 유교를 배격하고 서양을 끌어들여서 왕조를 멸망시키려는 존재로 판단합니다. 여기에는 진산사건과 황사영 백서사건이 한 몫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동시에 서양 선박과 교류하는 일 자체를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위기론과 낙관론의 공존
1840년대 조선은 연행사로부터 제1차 아편전쟁 및 청이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한 사실을 보고받습니다. 조선의 일부 지식인은 영국의 침략과 청군의 패배에 충격을 받았으며, 영국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도 합니다. 조선 정부는 청을 통한 아편 유입을 엄격히 단속함으로써, 아편의 폐해가 조선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 집권층은 영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의 청 진출을 직접적인 위협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양선의 출몰 배경을 천주교도의 내통과 연관지었습니다. 때문에 국내 천주교도를 단속하면 서양의 진출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을 전후로 조선에는 서구에 대한 위기의식과 낙관론이 공존했던 셈입니다.
위기론의 확대
제2차 아편전쟁에 대한 조선 조정과 재야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1860년 12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하고 함풍제(1831~1861)가 열하로 피난을 떠난 소식이 조선에 전해집니다. 이에 조선의 일부 관리는 서구 열강의 조선 침략을 우려한 나머지 낙향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집권층은 청과 조선을 '이와 입술의 관계'로 규정했으며, 서양의 침략이 국내 문제와 직결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집권층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민란을 수습하는 내수 지향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서구 열강과의 직접 접촉
1860년대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과 직접 접촉하게 됩니다.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청이 러시아에 연해주를 할양하면서 조선은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864년에는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넘어와 경흥에서 통상을 요구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1866년과 1871년에는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등학교때 배웠던 병인양요(프랑스)와 신미양요(미국)입니다.
조선 내의 서구문물 수용 및 문호개방 주장
그무렵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은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할 방안으로 서구문물 수용 및 문호개방을 주장합니다. 이규경과 최한기는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해야 한다며, 서구문물의 도입을 제기합니다. 특히 최한기는 서구의 침략 행위가 일시적일 것이라는 낙관적 관점에서 서양의 정치 및 법제도를 수용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오경석과 강위는 외세의 침략을 막고 근대문물을 도입하기 위해서 조선과 서구 열강의 조약 체결을 주장합니다. 오경석은 1874년과 1875년 베이징 주재 영국 영사 윌리엄 메이어스와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조선의 문호개방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국이 조선에 진출할 수 있는지 문의하기도 했습니다.
비공식 제국주의로서의 불평등조약체제
19세기 중반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력과 경제력으로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합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홍콩을 제외하고는 식민지 지배정책을 구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불평등조약체제를 통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지배력을 관철시킵니다. 이는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형태를 비공식적 제국주의로서의 불평등조약체제라고 합니다.
동아시아의 근대화운동
조선, 청, 일본의 동아시아 삼국은 서구의 침략을 겪으며 무기를 비롯한 서구의 근대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청은 중체서용의 원칙 하에 양무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조선은 동도서기 관점에서 서구문물을 도입하고자 했으며, 갑신정변, 갑오개혁,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로의 전환을 추진합니다. 일본은 문명개화론을 토대로 서구의 기술 뿐 아니라 문물 및 제도까지 수용하고자 했습니다. 동아시아 삼국은 서구의 침략을 방어하고 극복하기 위해 서구의 자본주의체제와 근대 국민국가 도입을 추진합니다. 서구의 근대 국민국가체제가 비서구로 전이되는 근대 국민국가의 전 지구적 연쇄 과정이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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