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대두
1863년 12월 철종(1831~1863)이 후사 없이 사망합니다.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다음 왕으로 결정합니다. 고종이 제26대 왕에 오르자, 흥선군은 왕의 친아버지에게 주는 작위인 흥선대원군으로 봉작됩니다. 즉위 당시 고종은 단지 11세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대왕대비 조씨의 수렴청정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풍양 조씨 가문은 대왕대비 조씨를 정치적으로 보좌할 권력 기반이 약했습니다. 대왕대비 조씨는 풍양 조씨의 세력을 키우고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든 나라의 일을 흥선대원군에게 위임하게 됩니다.
세도가문의 약화
흥선대원군은 세도가문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왕권 강화는 인적 청산과 통치기구의 정비로 구체화됩니다. 흥선대원군은 대왕대비 조씨와 안동 김씨 중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김병학, 김병국 등과 협력합니다. 양측의 지원을 받은 흥선대원군은 세도정권하에서 권력을 장악한 김좌근 일파를 정권에서 축출했고, 조정에서 소외됐던 북인과 남인을 등용해 노론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킵니다.
비변사 축소와 폐지
흥선대원군은 세도정권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던 비변사를 단계적으로 폐지합니다. 1864년에는 비변사의 외교, 국방, 치안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사무를 의정부로 이관합니다. 1865년에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비변사의 업무를 의정부에서 담당하도록 합니다. 이로써 의정부는 본래 직무에 비변사 업무까지 맡게 되면서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기관이 됩니다. 비변사의 군사 업무는 다시 삼군부가 맡도록 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정부, 육조,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하고 위상을 강화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경복궁 중건의 강행
1865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결정합니다. 조선 태조 때 지어진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부족의 이유로 중건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재건하여 세도 정권 하에서 실추됐던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경복궁 중건 초기에 조선 정부는 종친, 관리, 백성에게 자발적으로 원납전을 바치도록 유도했습니다. 중건 중이던 1866년에는 화재로 경복궁 전각 등이 소실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일부에서 재원 부족 등을 근거로 공사 중지를 요청합니다만, 흥선대원군은 중건을 강행합니다. 오히려 그는 재정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한양 사대문 출입시 문세를 부고하고 당백전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871년 경복궁 중건은 마무리됩니다.
세도정치에 따른 폐단
19세기 조선에서는 세도정치에 따른 폐단이 심화됩니다. 세도정권 하에 집권층이 대토지를 소유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지방관과 토호 및 서리가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거나 환곡에 대한 고율의 이자를 강요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지방관 중에는 세금을 부당하게 빼앗아 매관매직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지방의 서원과 향사는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면서 전세와 부역을 면제받았으며, 양민에게 재화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서우너과 향사는 당론에만 몰두하는 지방 유생의 소굴로 전락했습니다.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의 폐해는 양민의 토지 이탈을 불러와 정부의 재정난을 가져오고 조선 왕조의 근간을 흔들기에 이릅니다.
삼정문란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
집권 초기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에 따른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전국에 분포한 서원과 향사의 경제적 기반을 조사하는 한편,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한 만동묘를 철폐합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토지대장의 정비 및 양전을 시행했고, 호포제를 통해 양인 남성에게 부과되던 군포 대신, 양반부터 천민까지 신분을 막론하고 각 집집마다 호포 2냥을 징수하도록 합니다. 또 마을 단위 공동으로 환곡을 운영하는 사창제를 도입해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으며, 1871년에는 전국의 600여 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는 조치를 단행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의의와 한계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폐단을 줄이고, 구각 재정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삼정문란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경복궁 중건은 재정 약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원납전 징수와 묘지림 벌목에 따른 양반층의 반발과 과도한 과세 및 부역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을 낳았습니다. 당백전 발행으로 화폐 가치가 하락하면서 이것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국가 경제 및 백성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원과 향사의 철폐는 유생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개혁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는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에 나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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