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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천주교 탄압과 반침략 투쟁

by 우공 박 202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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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탄압과 위기감 고조

19세기 전후로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증가합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탄압합니다. 1839년 프랑스인 신부 3명과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기해박해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1846년 중국에 파견한 함대의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을 조선에 파견해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에 책임을 묻고 조선 침략을 경고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조선 정부는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계속해나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1864년 초 러시아인들이 두만강 국경을 넘어와 경흥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경흥 부사 윤협에게 조선과 러시아의 통상조약 체결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함경도 관찰사 이유원은 러시아인과 교류했다는 죄목으로 인근 지역민까지 처벌해버립니다.

주황색 칠한 부분이 경흥군이다.

정치적 이유로 일어난 병인박해

그 무렵 천주교인 남종삼은 흥선대원군에게 영국, 프랑스와 교섭해 러시아의 위협을 극복하자는 의견을 제안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받아들여 천주교 조선교구를 통해 프랑스와 관계 개선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주교 시메옹 베르뇌(1814~1866)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흥선대원군의 제안을 거부해버립니다. 마침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침략 위협이 과장됐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게다가 남종삼과 논의한 내용이 흥선대원군의 반대 세력에게 알려지면서 흥선대원군은 정치적 위기에 처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1866년 프랑스와의 교섭에 따른 정치적 비판을 피하고자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게 되는데, 이를 병인박해라고 합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병인양요의 발생

병인박해로 조선인 천주교도와 프랑스인 신부 9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앙리 벨로네는 청 정부에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비판하며 후속 조치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청 정부는 조선이 청의 속방이지만 내치와 외정은 자주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이에 프랑스는 청에 조선을 식민지화하겠다고 통보해버리고, 조선에 함대를 파견해 병인양요를 일으킵니다.

1866년 10월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해옵니다. 제1차 원정에서 프랑스 함대는 강화해협에서 양화진까지 진출해 지형 정찰 및 수로 탐사를 실시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함대를 다시 파견해 강화성을 점령하고,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의궤 등 각종 서적을 약탈해갑니다(제2차 원정). 프랑스는 자국 신부를 처형한 것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조선군은 프랑스의 침략에 단호하게 맞섰습니다. 결국 프랑스 함대는 도서를 약탈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발생

병인양요에 앞서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 인근에 도착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소총과 대포를 쏘고 조선 관리를 감금하는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 선원과 평양 군민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합니다. 대동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제너럴 셔먼호가 좌초되자 평양 군민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몰살시켜버립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청 정부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과 진상 규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청 정부 역시 병인양요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이 내치와 외정은 자주적으로 시행한다고 밝힙니다. 이에 미국은 1871년에 존 로저스 사령관이 지휘하는 해군 함대와 해병대를 조선으로 출동시킵니다.

 

미국 함대는 조선 정부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죄와 난파선 보호 협정의 체결을 요구합니다. 물론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미국 함대는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을 무력으로 점령해나갑니다. 조선군은 광성진 전투에서 미군의 공격에 격렬히 대항했고, 그 이후에도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 함대는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강화도에서 철수합니다.

조선 정부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규정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의 승리를 알리면서 전국에 척화비 설치를 명령합니다. 척화비에서는 서양과의 교류를 주장하는 행위를 매국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명분으로 내부 통제를 한층 강화하게 됩니다.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를 배경으로 한 미군

흥선대원군과 척화비

척화비는 고종이 서양 제국주의의침략을 배격하고 쇄국을 강화하기 위한 결의를 드러내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93개나 설치합니다. 척화비의 비문에는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화해를 하자는 것이다. 화해를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같으니,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척화비가 남아있습니다.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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