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Talk

자주적 외교정책의 전개

by 우공 박 2023. 2. 21.
반응형

거문도 사건의 발생

1885년 4월 15일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합니다. 영국에게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 기지이자 석탄저장소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만국공법'을 인용해 점령의 불법성을 주장하고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항의합니다. 영국은 거문도 임대를 시도했지만, 조선 정부는 무조건 철수를 주장하면서 영국의 제안을 거부해버립니다. 결국 영국은 청을 통해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 1887년 2월에 거문도에서 철수합니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과 주민들

묄렌도르프의 해임과 열강의 각축

갑신정변 직후 묄렌도르프와 일본 주재 러시아 외교관은 영흥만을 러시아에 조차해주는 대가로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하고 군사교관을 파견하기로 약속합니다. 1885년 5월에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서기관 알렉세이 슈페이예르(Alexei de Speyer)는 조선 정부에 러시아 군사 교관을 임명하라고 압박합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러시아 훈련 교관을 초빙하겠다는 약속을 부인하고, 청의 압박으로 뭘렌도르프를 외아문 협판에서 해임해버립니다. 1886년에도 고종이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영흥만을 러시아에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소문(제2차 조러밀약설)이 돌았습니다. 이 소문은 사실 자체가 불분명했지만, 위안스카이는 고종 폐위를 주장하면서 조러밀약설에 강경하게 대응합니다. 이렇게 갑신정변 이후 조선의 독립은 크게 위협받습니다. 청은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고, 조선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의 대립이 심화됩니다.

묄렌도르프

자주적 외교 정책의 시도와 좌절

고종은 1885년 5월 궁궐 안에 내무부를 설치하고 군국기무를 총괄하도록 합니다. 내무부는 군사, 재정, 외교 등 개화, 자강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고종은 내무부를 통해 자주권 회복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 공사를 파견해 독립국임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1887년 8월 18일(음력 6월 29일)에는 박정양을 미국 주재 공사로, 심상학을 유럽 5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주재 공사로 임명합니다.

 

청은 최초로 시행되는 조선공사 파견을 반대했지만, 미국 정부가 반발하면서 이를 막을 명분을 내세우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청은 박정양을 미국 주재 공사로 파견하는 대신 영약삼단을 맺어 3가지 사항을 준수하라고 요구합니다. 첫째는 박정양이 미국에 도착하면 청국공사를 만나서 그의 안내를 받아 미국 국무부로 갈 것, 둘째는 박정양이 각종 외교 모임에서 주미 청국공사보다 상석에 위치하지 말 것, 셋째는 현안이 있을 때 박정양은 청국공사와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1887년 9월 박정양은 참찬관 이완용과 미국으로 출발해 1888년 1월 워싱턴에 도착합니다. 그는 워싱턴 주재 청국공사를 접견하기 전 미국 국무부를 방문했고, 이어서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제출합니다. 그러자 청국공사 장인환은 박정양이 영약삼단을 어겼다고 주장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위안스카이는 고종에게 박정양의 소환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청의 압력으로 박정양은 부임한 지 1년 만에 소환되어 귀국합니다.유럽 공사 심상학의 후임으로는 조신희가 임명됩니다. 그런데 조신희는 공사로 부임하지 않은 채 홍콩에서 2년여 머물다가 귀국합니다.

 

갑신정변 후 조선의 외교정책은 청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면서 국제법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밝히는 방향으로 시도되었습니다. 도쿄 주재 조선공사였던 김가진은 도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해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청이 재정 면에서 지배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종이 미국, 프랑스, 일본 등과 차관 교섭을 시도했지만, 청의 방해로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조선 정부는 해관세를 담보로 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야 했으며, 그로 인해 조선의 내정과 외정에 걸친 청의 간섭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길준의 「중립론」

유길준은 1885년 「중립론」을 저술합니다. 이 글은 유럽의 벨기에에서 적용 중이던 중립화에 불가리아식을 더한 것으로, 그 내용은 청이 맹주가 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와 조선 중립화조약을 체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유길준은 중립화 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침략해올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내용의 일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오직 중립 한 가지만이 진실로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이다. 그러나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그것은 중국에 요청해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중국이 혹 일을 핑계 삼아 즉시 들어주지 않으면 오늘 청하고 내일 또 청해서 중국이 맹주가 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 아시아 지역과 관계 있는 여러 나라와 회동하고 이 자리에 우리나라를 보내어 공동으로 맹약을 체결하기를 구해야 한다."

 

유길준

반응형

'역사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학농민운동 제1차 봉기  (0) 2023.02.22
동학 교조신원운동  (0) 2023.02.22
갑신정변의 발생  (0) 2023.02.21
근대화 정책의 추진과 임오군란  (0) 2023.02.21
서양국가와의 조약 체결  (0) 2023.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