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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동학농민운동 제1차 봉기

by 우공 박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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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봉기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1844~1911)은 군민에게 탐학과 수탈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로 보내는 대동미를 자신이 취하는 부정부패를 자행했습니다. 여기에다 만석보를 새로 쌓는다는 명분으로 농민의 노동력을 동원하고, 만석보에서 나오는 물에 높은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고부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1855~1895)에게 수세 징수 경감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민소 작성을 부탁합니다. 전봉준은 농민들과 함께 직접 관아를 찾아가 조병갑에게 민소를 제출했지만, 묵살당합니다. 이에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작성해서 동지들을 모으고,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교도 및 농민과 함께 고부에서 봉기하기에 이릅니다.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했지만, 조병갑이 전주로 도망가 그를 처단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농민들은 조병갑이 불법적으 로 수탈한 수세미를 군민들에게 돌려줬으며, 만석보도 파괴해버립니다.

 

소식을 들은 조선 정부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을 후임 고부 군수로 임명합니다. 박원명은 농민들에게 봉기의 책임을 묻지 않는 온건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대부분의 농민이 곡식을 돌려받은 터라 자진 해산했으나, 전봉준과 일부 농민은 봉기를 확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백산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만석보터

농민군의 세력 확대

사태가 수습되어가던 중 안핵사 이용태(1834 ~ 1922)가 농민과 동학교도에게 봉기의 책임을 전가하며 그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살상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전봉준은 1894년 음력 3월 각 지역 동학 접주들에게 보국안민과 교조신원을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돌립니다. 그 통문에는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진격하자는 것과 탐관오리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한 척족을 제거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1894년 4월 25일(음력 3월 20일) 전봉준이 지도하는 동학농민군 약 4,000여 명은 무장현에서 봉기합니다. 그들은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내세운 창의문을 발표하고, 고부 관아를 점령합니다. 농민군 지도부는 백산에 주둔하면서 1만여 명으로 구성된 농민군을 편성하고, 격문과 행동강령 기율을 만들어서 농민군의 기장을 세웁니다.

 

동학농민군은 고부 봉기가 보였던 민란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또한 봉기의 목적이 보국안민과 척왜양임을 밝힘으로써, 조선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고부 점령을 시작으로 전라도 일대를 빠르게 차지했으며, 5월 11일(음력 4월 7일) 황토현전투에서 농민군이 감영군을 크게 무찌른 일을 계기로 농민군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증가합니다.

봉기하는 농민군

 

전주성 입성과 청일 군대 출병

전라도 내 관군만으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조선 정부는 5월 6일(음력 4월 2일)에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해 진압을 명령합니다. 5월 11일 홍계훈은 외국 교관에게 훈련받고 최신 무기를 소지한 약 800여 명의 경군을 이끌고 전주성에 입성합니다. 그런데 황토현 전투에서 감영군이 패배한 소식이 전해지자, 경군에 소속된 병사 200여 명이 이탈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홍계훈이 조정에 요청한 병력을 기다리며 전주성에 머무르는 사이 농민군은 정읍, 고창, 무장, 영광, 함평, 장성 일대를 차례로 장악하고, 전주성 공격을 준비합니다. 조정에서도 홍계훈의 요청에 응해 추가 병력을 보내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했으나, 장성 전투에서 농민군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농민군은 이를 기회로 북진을 거듭한 끝에 5월 31일 전주성에 무혈입성에 성공합니다.

 

조정에서는 민영준(나중에 민영휘로 개명)을 중심으로 청에 파병을 요청합니다. 리훙장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청군 파병을 결정합니다. 마침 청의 파병 소식을 접한 일본도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과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조선 파병을 결정합니다. 이때 제물포조약과 톈진조약은 일본군 파병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전주 화약의 체결과 폐정개혁안 실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경군에게 강화 방안을 제시했는데, 그중 정부가 폐정개혁안을 수용하면 농민군을 해산하겠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지도부가 강화를 제시한 것은 청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전주성 입성 이후 경군과의 거듭된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 농민군 내부의 위기감도 작용했습니다. 농번기를 맞이해 농민군을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도 고려됐습니다.

 

청일 군대의 주둔을 우려했던 조선 정부도 농민군을 해산해 청일 군대가 철수할 명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고종은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농민군이 요구한 탐관오리 징계, 명목 없는 잡세 폐지를 수용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에 김학진은 농민군 지도부에 폐정개혁안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면서 농민군 해산을 설득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학농민군과 정부는 6월 11일(음력 5 월 8일)에 전주화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동학 지도부와 농민군은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폐정개혁안에는 탐관오리에 대한 처벌을 비롯해 각종 잡세와 노비제도 폐지, 고른 인재 등용, 과부 재가 허용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발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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