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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동학 교조신원운동

by 우공 박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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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창시와 정부의 탄압

경주의 몰락한 양반 최제우는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천명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860년 민간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사상을 융합한 동학을 창시하고, 동학의 근본사상으로 시천주(侍天主)를 제시합니다.

 

동학은 삼정문란으로 고통받던 민중을 중심으로 확산됩니다. 특히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교도 수가 증가합니다. 한편 조선 정부는 동학을 사교로 규정하고, 동학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전개합니다. 심지어 1864년에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최제우(1824~1864)를 처형해버립니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 제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은 정부가 지속적으로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을 재건하고 교세를 확장하고자 노력합니다.

최제우
최시형

이필제의 난과 정부 탄압의 완화

1871년, 이필제가 동학교도들과 함께 경상도 영해부 관아를 습격하고 수령을 처단한 사건인 '이필제의 난'이 발생합니다. 이필제의 난은 영해 지역의 동학교도를 탄압한 것이 직접적 원인이었습니다.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동학의 종교적 자유를 주장하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합니다. 이필제는 이보다 수개월 전부터 영해 인접 지역의 민중을 모으고 있었는데, 이는 고을 단위로 전개됐던 과거 여러 민란이 지닌 지역적 고립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양상을 보입니다.

 

실제로 조정에서도 이필제의 난을 변란으로 규정하고 5일 만에 이필제의 난을 진압한 후, 동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교세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혼란을 겪으면서 동학에 대한 정부 의 탄압이 완화되는데, 이를 기회로 최시형은 동학 교단을 정비하고 교세를 더욱 키워나갑니다.

 

당시 향촌사회에서는 수령과 이서배의 민중 수탈이 계속되었습니다. 집권층의 매관매직 현상도 여전히 성행했습니다.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얻은 수령들은 과다한 세금 부과와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했고, 그 과정에서 민중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집회로 얻은 것

1892년 음력 10월, 동학교단은 충청도 공주에서 집회를 개최합니다. 동학 지도자들은 충청감사 조병식(1823~1907)에게 교조신원과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조병식은 동학금단령 해제는 조정에서 처리할 문제라며 교조신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동학교도에 대한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를 약속합니다. 동학 지도자들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집회 계획에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해 음력 11월 동학 지도자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개최해 전라감사 이경직(1841~1895)에게 충청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조신원과 더불어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합니다. 이경직은 동학을 이단으로 규정한 정부 조치를 언급하면서, 집회를 해산하고 동학을 믿지 말라고 답했습니다. 동학교도가 이에 반발하자 이경직 역시 동학교도에 대한 수령의 수탈 금지를 약속했으며, 교조 신원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처리할 일이라고 밝히는 등 한 발 물러섭니다. 이에 지도자들은 집회 해산을 추진했는데, 동학교도들은 정작 교조신원을 획득하지 못한 사실에 반발합니다. 동학교단은 최시형 명의의 통문에서 임금을 상대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뜻을 밝히면서 재차 해산을 요청합니다.

 

정치적 구호의 등장과 민중의 결합

1893년 음력 2월 동학교단은 대표자 40명을 서울로 보냅니다. 이들은 교조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제출하는 한편, 광화문 앞에서 교조신원과 탐관 오리의 처벌을 요청했습니다. 정부는 동학교도에게 자진 해산을 명하면서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고 회유합니다. 동학교도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는 동학교도의 서울행 및 복합상소를 막지 못한 이경직과 한성판윤 신정희를 파면하고, 복합상소를 주도한 박광호를 체포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정부가 교조신원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하자, 최시형을 중심으로 동학교단의 지도자들은 1893년 음력 3월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2만여 명의 동학교도는 교조신원과 종교의 자유를 요구합니다. 그 무렵 전라도 금구에서도 1만여 명의 동학교도가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세도가가 탐관오리와 부정부패의 원흉이라며 비판했고, 척왜양을 내걸며 의병 봉기를 주장합니다. 보은 집회를 시작으로 동학 집회에서는 교조신원과 더불어 반봉건과 반외세의 정치적 구호가 등장합니다.

 

정부는 보은 군수를 통해 집회 해산을 명령합니다. 동학교단이 해산령을 거부하자, 정부는 어윤중(1848~1896)을 보은으로 파견해서 동학 지도부에게 회유와 설득을 시도합니다. 동학교단은 어윤중에게 동학을 탄압하지 않겠다는 왕의 회답을 받으면 해산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어윤중이 고종의 해산 명령을 전하자, 무력투쟁보다 평화적 노선을 택해 1893년 4월에 집회 해산을 결정합니다.

동학은 교조신원을 통한 종교적 자유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동학 지도부는 교조신원과 더불어 척왜양과 탐관오리 처벌을 주장함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며, 이는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발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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