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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친일파의 육성

by 우공 박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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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강제병합과 초기 친일협력 세력

1910년대 식민지배는 헌병경찰 등과 같은 강압적인 수단에 크게 의존했지만, 일본의 통치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 문화 전통과 1,7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한국을 일본의 물리력과 행정조직만으로 통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부족한 통치력을 뒷받침하고, 민족적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협력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침략 초기부터 친일협력 세력을 육성하고, 포섭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러일전쟁 이후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자, 일제의 한국 침략에 영합하는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대두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완용 등 친일 고위 관료들은 일신의 안위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의 을사조약 강요와 한국 강제병합에 협력했습니다. 친일단체도 등장합니다. 친일 정치단체 일진회는 친일 연설회를 개최하고 의병운동 탄압을 자원했으며, 1909년에는 합방청원서까지 발표했습니다. 일제 병합에 앞장섬으로써 새로운 지배집단이 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1910년 국망 이후에는 한국인의 정치단체 결성과 활동이 금지되면서 일진회도 해산됩니다. 그리고 총독부는 친일협력 세력을 새롭게 구성합니다. 먼저 조선 귀족을 임명해 친일 세력의 상징으로 내세웠습니다. 조선 귀족은 한국병합 과정의 공로를 기준으로 선발된 최고위층 친일파였습니다. 이들은 은사금과 작위를 수여받았고, 구지배층을 대 또해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했습니다. 또한 총독부는 양반 지배증의 주요 인사들을 형식적 자문 조직인 중추원 의판에 임명해 친일 세력을 확대합니다.

 

민족분열정책과친일협력세력

일제는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다양한 민족분열정책과 친일 세력 육성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합니다. 먼저 친일운동단체로서 국민협회, 유민회, 대동동지회, 동민회, 대동사문회 등이 조직되어 활동했습니다. 이 단체들은 '내선융화', '신일본 건설'을 주장하며 '참정권 청원운동' , '자치 청원운동', '내선융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내지연장주의' 를 실현해 한국인도 일본제국의 완전한 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친일세력의 주장이었습니다.

친일협력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정치, 경제적 이익과 특권의 확보였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함으로써 사적 이익을 얻고 특권을 가진 식민지배층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주, 자본가는 지방자문기관과 각종 관변기구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조선총독부에 협조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지배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충성심을 입증해 고위직에 진출하려 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에 편승해 아류 식민지배자가 되려는 욕망이 작용한 것입니다. 특히 1930년대 만주국 관리, 군인이 된 인물들은 새로 흡수된 식민지의 지배층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친일협력을 정당화하는 논리

친일협력활동은 개인의 욕망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친일협력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논리가 뒷받침됐기 때문입니다. 친일협력을 정당화한 핵심 논거는 민족의 주체성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한민족은 독립국가를 유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충실한 제국 신민이 되어 현실적 이익을 확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대표적 친일파인 윤치호에 의하면 '물지 못하면, 짖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논리는 식민 침략 초기부터 등장했습니다. 친일을 정당화한 첫 번째 논리는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었습니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류사회도 약육강식의 진화 법칙이 관찰되며, 근대화에 실패한 한국 민족은 강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사회진화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는 민족적 생존을 위해 식민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독자적인 민족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기보다는 같은 동양 민족인 일본과 합방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친일단체 일진회에 의하면, '자발적으로 일본제국의 일원이 되어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받는 것'이 한국 민중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3.1운동을 부정한 친일세력 역시 기본적으로 같은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이완용, 민원식 등은 3.1운동을 세계정세에 무지한 민중의 위험한 맹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참정권 청원운동

문화통치가 전개된 1920년대에는 이런 논리가 더 구체화됩니다. 가망 없는 독립을 주장하기보다는 일본제국 신민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대표적 예가 1920년대 최대 친일단체였던 국민협회가 추진한 참정권 청원운동이었습니다. 국민협회는 한일병합을 통해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을 초월하는 신일본이 건설됐으므로, 참정권을 부여받아 신일본 국민이 되자고 주장했습니다. 소민족을 통합한 대민족 국가만이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며, 한국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민족 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민족 국가인 신일본의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인 이상의 충성스러운 국민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자 민족운동에서 탈락한 세력들은 농촌진흥운동 등 총독부의 사회개량화 정책에 포섭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사상통제정책과 일본의 전쟁 승리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사상 전향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제국의 팽창을 기정사실화하고 아류제국 신민의 위상을 확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지방 유지의 친일협력도 확대됩니다. 일부 지방유지들은 도회, 부회로 개편된 지방자문기관에 참여해 지배권을배권력의 보조자로 활동하면서 정치경제적 이권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민족해방의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전면적인 사회통제가 개시되자 체제 협력을 통해 현실적 이익을 확보하려는 세력이 확대된 것이었습니다.

 

친일 세력의 전쟁 협력

친일세력은 황국신민화 정책, 전쟁 총동원정책의 전면에 나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합니다. 상당수의 한국인 명망가와 지방 유지들은 자의든 타의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방공협회와 같은 각종 관변동원단체에 참가했습니다. 경찰, 행정 계통의 한국인 관리들은 인력 동원과 징병, 물자 공출을 집행했습니다. 그 안에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 같은 야만적 행위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출세를 위해 만주국 관리, 만주국군, 일본군 장교가 된 인물들의 친일활동도 두드러졌습니다. 침략전쟁에 참여한 것은 물론, 간도특설대 등에 참여해 만주 지역 독립군 탄압에도 앞장섭니다. 전쟁 참여가 일본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라고 주장하며, 민족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하는 활동에 적극 협력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자, 친일세력은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을 기정사실화하고, 내선일체를 완전히 실현해 동아 신질서의 주체가 되자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친일 지식인 이광수는 법적, 정치적 일체화를 넘어, 정신적으로 천황의 적자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또한 친일세력은 조선이 일본제국이 추진하는 일본-만주-중국 블록에서 제2의 내지(일본)가 되기 위해서는 전쟁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대륙 병참기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에 민족의 모든 것을 던짐으로써 또 다른 제국주의의 지배세력으로 재탄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친일 세력은 다양한 논리로 친일활동을 정당화했지만, 결국 제국주의 지배체제의 또 다른 지배층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친일 논리의 귀결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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