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경제정책
일제는 문화통치로 전략을 전환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부분에서 식민지배체제를 개편해 나갑니다.. 먼저 경제면에서는 1920년 「조선회사령」을 폐지해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전시 호황으로 자본을 축적한 일본 기업이 자유롭게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값싼 조선 쌀을 일본 시장에 공급해 일본 미곡시장의 수급 불안정성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합니다.
정치사회적 탄압정책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부분적으로 허용했지만, 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교묘해집니다. 민족운동이 성장, 확대될수록 이를 분열, 약화시키려는 시도도 강화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특히 급성장하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훨씬 강경한 억압책을 적용했습니다. 1925년에는 일본에서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조선에도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안유지 법의 핵심은 '국체를 변혁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결사를 조직하거나 이를 알고도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928년에는 최고형을 사형으로 높이는 개악도 이뤄졌습니다. 치안유지법은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법이었지만, 식민지 조선의 독립은 일본 국체의 변혁에 해당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한국인의 민족운동을 탄압하는 데도 이용됩니다.
민족문화와 역사 왜곡
민족문화와 역사에 대한 식민주의의 왜곡도 강화됩니다. 총독부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총 36권의 방대한 「조선사」를 편찬, 간행했습니다. 도쿄 및 교토제국대학의 관학자들이 전 과정을 주도하고, 사료 수집과 정리에 한국인 학자들을 동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일제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가 고대 이래 중국 혹은 일본의 외적 자극에 의해서만 진전됐으며, 왕조가 교체됐음에도 한반도의 사회, 경제적 수준은 중세 이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타율성과 정체성을 부각시켜 식민지배의 필연성을 뒷받침하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구체화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1920년대 일제의 통치정책은 한편으로 문화통치라는 유화책을 통해 민족적 저항을 약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배체제를 구조적으로 안정화하기 위한 제도, 이념적 장치들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화를 내세운 차별교육
문화통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도 변합니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보통학교 연한이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연한도 각각 4년, 3년에서 5년, 4년으로 연장됩니다. 또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배제됐던 대학교의 설립이 가능해졌고, 독립된 교원 양성기관인 사범학교도 설립되기 시작합니다. 형식적으로 일본인과 동일한 학제를 적용해 교육 차별을 받고 있다고 여기던 한국인의 불만을 완화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인의 교육 기회가 충분히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1개 면 당 1개 학교 설립 목표 연도인 1936년에 전국의 보통학교는 2,498개로 늘어났지만, 그 가운데 절반가량은 여전히 4년제 학교였습니다. 게다가 중등 이상 교육기관은 불문율처럼 모집 인원을 일본인에게 유리하도록 민족별로 할당했습니다. 동등한 교육을 표방했지만 한국인에게는 여전히 제한된 기회만 주어졌습니다. 한편 식민지배에 필요한 고등 인력 수요가 늘어나고, 고등교육기관 부재에 대한 한국인의 비판이 거세지자, 총독부는 제국대학령에 의거해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합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이자, 식민지기에 존재했던 하나뿐인 대학이었습니다. 총독부는 경성제국대학을 한국인을 위한 최고교육기관으로 선전했지만, 한국인 학생은 전 기간을 통해 전체의 3분의 1에 그쳤습니다. 경성제국대학의 핵심 기능은 엘리트 지배 관료를 육성하고 식민지배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있었습니다.
농촌사회 개량화와 식민지 공업화
일본은 1920년대 내내 전후 불황에 따른 경제 불안정에 시달립니다. 일본 정부의 재정, 통화정책도 내각에 따라 급변해 일본 경제에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여기에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은 같은 해 7월에 출범한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이 일본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추진한 재정긴축 등의 디플레이션정책과 겹치면서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초래합니다. 특히 쌀, 누에고치 등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일본 농촌사회가 맞은 위기는 심각해집니다. 이에 일제가 대공황의 탈출구로 선택한 것은 국내 시장의 확대를 지향한 미국의 뉴딜정책과 달리 만주침략을 통한 일본 경제권의 확장이었습니다.
엔화 블록 구축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경제블록 구축에 나섭니다. 조선총독부는 만주를 농업지대로, 일본을 '정공업(높은 단계 공업)'지대로 상정한 뒤 조선을 만주, 일본을 잇는 '조공업(낮은 단계 공업)'지대로 재편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구상 아래 총독부는 조선 공업화를 추진하고, 일본 자본이 조선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합니다. 일본에서 시행 중이던 규제를 조선에는 적용하지 않는 반면 노동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는 등, 조선에 진출한 일본 자본에 다양한 지원정책을 제공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멘트, 비료, 화학 등 중화학공업과 만주 시장을 노리는 제사, 방직업 분야에 진출하는 일본 자본이 확대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자본가들의 투자도 늘어났지만, 대개 섬유나 고무신 등 특정 소비재 부문에만 집중됐으며 여전히 소규모 가내공업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총독부의 농업정책 변화
총독부는 농업정책의 기조도 전환했다. 본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대공황 이전부터 쌀 공급량을 조절하는 정책을 추진하다가 1934년에 이르러서는 산미증식계획 자체를 중단합니다. 일본으로 보내는 조선 쌀이 늘어나자 일본 시장에서 공급 과잉에 따른 쌀값 폭락이 벌어져 일본 농촌사회에 위협을 가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총독부는 쌀 증산을 위해 지주의 이익을 중시하던 지주 중심적 정책 대신 농촌사회를 안정화하고 농민들을 식민체제 속으로 끌어들이는 사회개량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대공황에 따른 농산물 가격 폭락이 소작쟁의 등 농민운동으로 격화하던 농촌사회에 동요와 위기를 증폭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두 가지 유형의 정책이 추진됩니다. 하나는 관제 농민운동인 농촌진흥운동이었습니다. 농촌진흥운동은 총독부가 농가경제 갱생계획 등을 통해 농촌의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타개하여 농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농촌사회를 통제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작농지 설정사업, 「조선소작조정령」(1933), 「조선농지령」(1934)과 같은 사회개량적 농지정책이었습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을 통해 농촌사회의 계급 갈등을 완화하는 동시에 농촌진흥운동도 보조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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