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도발과 전쟁 확대
1931년 일제는 중국 동북 지역을 침략한 뒤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유럽 열강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이후 대규모의 침략전쟁과 전시경제를 통해 팽창을 계속해나갔습니다. 전쟁이 확대되자 조선도 전시공업체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1936년 10월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산업경제조사회에서 조선의 공업도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진흥시켜야 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전까지 일본에만 적용하던 「중요산업통제법」을 1937년부터 조선에도 적용하기로 합니다. 산업 발전이 뒤처진 조선의 상공업을 보호하기 위해 「중요산업통제법」 적용을 유예하자는 주장은 전시 통제의 필요성에 의해 밀려난 것입니다.
1937년 7월 일본은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자금과 노동력, 자원 모두를 군수산업에 집중시킵니다. 1937년 10월에는 「임시자금조정법」을 시행해 광업, 철강업, 항공기 및 병기 제조업에 자금을 우선 투자하도록 했습니다. 1938년 5월에는 총력전 수행을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정부가 통제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규정한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합니다.
전시 통제 조직
일제는 경제자원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엄격히 통제하고 동원하는 조직도 만들었습니다. 1938년 7월 조선충독부는 민과 관을 아우르는 조직인 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을 조직합니다. 행정 단위 별로 연명을 만든 것은 물론이고 연맹의 말단조직으로 마을마다 '부락 연맹'을 두고 다시 각 가정을 10호씩 묶은 '애국반'을 조직해 사회 전반을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총독부는 1940년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재편하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을 통합해 국민총력운동을 벌입니다. 국민총력운동에서는 사상 통일, 내선일체 완성, 신체제와 함께 특히 생산력 확충이 강조되었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나 국민총력 운동에서는 애국반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총독부는 애국반으로 하여금 매월 회의를 열고 총독부의 전시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한편 천황의 조서를 읽고 궁성을 향해 절하며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는 의례를 거행하도록 강요했습니다. 1940년대에 접어들자 애국반에게 생활필수품 배급 역할을 맡기고, 그 역할을 활용해 일반 주민의 매월 애국일 행사 및 반상회 참여를 종용하도록 했습니다.
병참기지화 정책
군수산업 중심의 전시경제체제는 일본의 거대 독점자본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부 한국인 자본가들도 군수산업 분야에 진출했지만 주변적 위치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일제가 침략전쟁을 위해 그 세력권 내 경제체제를 재편하면서 조선은 안정적인 군수 물자 공급을 위한 대륙 병참기지 역할을 떠맡았습니다.
군수공업에 진출하지 못한 한국인 공장들은 통폐합됐고, 살아남은 기업도 원자재 부족 등으로 생산성과 생산액이 크게 감소합니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습니다. 일본에서는 1916년부터 공장법이 실시돼 노동시간과 최소 연령 등이 제한됐지만, 조선에는 이 법이 끝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전쟁이 오래 지속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되면서 민중의 생활고는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내선일체와 민족 말살
1936년 6월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은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걸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황국신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조선 총독부는 1937년 10월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해 학교를 비롯해 사회의 각종 행사에서 제창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새긴 탑과 비를 각지에 세웁니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조선에서만 제창된 것으로 식민지 황민화정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마다 천황의 사진을 두는 봉안전이 설치됐고, 천황이 사는 도쿄를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도 행해졌습니다. 신사참배 강요도 더욱 심해져 끝내 이를 거부한 평양의 숭실 전문학교 등 일부 기독교 계통의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황국신민화 정책
1938년 4월에 시행된 제3차 「조선교육령」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학교에 다니게 한다는 내선공학을 내걸고 한국인이 다니던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의 명칭을 각각 일본인 학교와 같은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통일합니다. 일제는 내선일체를 구현해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없앤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제3차 「조선교육령」은 한국인 청년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앞둔 군부의 교육시설 개선안을 그대로 수용한 개정이었습니다. 한국어 교육의 기회를 실질적으로 없애고, 일본사와 수신, 공민 과목을 강화하는 등 한국인을 더 철저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1941년에는 총독부가 일본의 변화에 발맞춰 소학교의 이름을 '국민학교'로 바꾸고, 명목으로만 남아 있던 한국어 교과목들도 완전히 없애버립니다. 이후 군사교육을 강화하고 충동학교 수업 연한도 단축했으며, 학생들을 노동 인력으로 동원했습니다. 결국 학교는 일상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실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공포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과 통제도 강화됩니다. 일제는 1936년에 공포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해 전국 1곳에 보호관장소를 두고 사회로 복귀한 사상법, 즉 치안유지법 위반자를 감시합니다. 이어 1938년에는 전향자조직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창립합니다. 전향자를 소극적으로 감시하는 것을 넘어 국책을 선전하는 사상전에 적극 동원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1941년 3월에는 범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재판 없이 보호관찰 대상자를 구금할 수 있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실시됩니다.
창씨개명의 강요
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1940년 2월부터 6개월 동안 조선식성을 대신하는 일본식 씨를 만들어 신고하도록 합니다. 이른바 '창씨 개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8월 10일까지 총 호수의 80.3%가 창씨를 신고합니다. 총독부는 신고가 강제가 아니라고 선전했지만, 창씨를 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가해졌습니다.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했고, 청년들은 총독부 관련 기관에 채용될 수 없었습니다. 일반 주민들도 식량 및 물자 배급 순위에서 밀려나는 등 힘든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신고를 하지 않더라도 기존 성을 일본식 씨로 일괄 등록했으므로 창씨는 강제된 셈입니다. 저항하는 뜻에서 창씨를 신고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지만, 일본식 씨를 만들지 않았던 친일파도 제법 있었습니다. 총독부 고위 관료인 김대우, 중추원 참의 한상통, 일본 중의원 의원 박춘금 등 친일파는 특권층이었기에 자신의 성을 그대로 씨로 삼아도 불이익을 받지 않았습니다.
언론탄압
1940년 8월에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됩니다. 가혹한 언론 통제 아래 이미 이렇다 할 반일 저항이 어려웠음에도 총독부는 한글 신문의 존재 자체를 위험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는 한글 연구를 독립운동으로 물아붙인 1942년 가을의 조선어학회 사건과 맥을 같이합니다. 1942년부터는 국어상용 운동을 벌여 일반인들에게 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합니다.
내외지 행정일원화 조치
1941년 12월에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42년 5월에 고이소 구니아키가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고이소 충독은 '도의 조선' 건설을 강조했습니다. 도의 조선이라는 구호는 한국인에게 황국 신민이 되어 침략전쟁 수행에 몸과 마음을 바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1942년 11월 일본 정부는 내외지 행정일원화 조치를 취합니다. 조선의 특수성을 부정하고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완전히 편입하려는 시도를 노골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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