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곡증산계획의 부활
1934년부터 중단됐던 산미증산정책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식량 수요가 늘면서 미곡증산계획(1939)으로 부활하기 시작합니다. 이 계획은 토지개량이 아니라 경종법을 포함한 농사방법 개선에 의존해 빠른 증산을 도모하려 했으나 그해 여름 대가뭄으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농사방법 개선에 중점을 두면서도 토지개량도 병행하는 「조선증미계획」을 1940년부터 실시해 적극적인 미곡증산에 나섭니다. 동시에 전쟁 탓에 자금, 비료, 노동력 투입이 쉽지 않아 쌀의 증산이 여의치 않은 점을 고려해 쌀의 생산과 유통도 직접 통제하고 나섭니다. 그 일환으로 먼저 1940년 「조선미곡배급조정령」을 시행해 그해부터 쌀 공출을 시작합니다. 1943년에는 '부락(마을) 책임 공출제'와 '공출 사전 할당제'를 시행합니다. 그에 따라 쌀 생산량 대비 공출량의 비율은 1941년 43%에서 64%로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전쟁 자금 충당
총독부는 강제 저축을 통해 부족한 전쟁 자금을 메우고자 했습니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할 때는 물론 농어민에게 농수산물 대금을 치를 때도 일정액을 원천 공제하는 방식으로 강제 저축을 실시합니다. 그 결과 조선의 총 저축액은 1937년에서 1944년까지 7년 동안 100배 이상 늘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자금은 일본 국채를 대규모로 매입하거나 전쟁 관련 업종에 대한 대출이 필요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총독부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금 등 지하자원의 채굴도 급속히 늘려갔고, 금속류 회수령(1941)을 내려 가정의 놋그릇, 교회의 종, 절의 불상까지 걷어갔습니다.
인력 강제 동원
일제는 사람들도 전쟁에 강제로 동원합니다. 육군특별지원병령(1938), 해군특별지원병령(1943)을 공포해 한국인 청년을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전쟁이 갈수록 확대되고 병력 자원이 부족해지자 육군특별 지원병 일시 채용 규칙(1943)을 공포합니다. 학도병이라는 명목으로 전문학교 재학생 이상 한국인 청년을 강제로 동원해 전선에 투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부 한국인 청년은 전투병이 아니라 군속으로 동원됐는데, 연합군 포로 감시원으로 배치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 B,C급 전범으로 분류돼 군사재판에서 처벌 받기도 했습니다.
1942년 5월 일본 정부는 1944년부터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1944년 4월에 징병검사가 실시되고, 같은 해 9월 입영이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8월까지 한국인 군인 및 군속은 24만여 명이 동원됐고, 그 가운데 2만 2,000여 명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 전사자는 다른 일본인 전사자와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족들은 2000년대 들어 합사 반대운동을 펴기도 했습니다.
노동력 강제 동원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 이후 한국인은 '모집'이나 '관 알선' 방식과 '징용'을 통해 노무자로 동원되었습니다. 모집이나 관 알선 방식에서는 총독부가 사업주의 의뢰를 받고 행정력을 동원해 노무자의 모집, 선정, 계약, 송출 과정에 깊이 개입했습니다. 이러한 노무동원은 계약의 형식을 빌렸으나 계약이 끝나도 돌아올 수 없는 등 강제성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리고 징용은 1939년 「국민징용령」에 의거해 행해졌습니다. 총독부가 노무자를 직접 동원해 각 사업 장에 송출하는 방식이었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1944년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1945년까지 이렇게 해외로 동원된 한국인 노무자의 연인원은 70만~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이들 가운데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혹사당하다가 탈출하는 경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편 국내의 주요 산업시설이나 토건 공사장 등에도 모집이나 관 알선 방식과 징용은 물론 근로보국대 결성을 통해 수백만 명의 한국인이 노무 인력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그중 일부 한국인 여성들은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편성돼 국내외 노무 인력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로서 전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도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만주사변 이후 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위안소 설치와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는 위안소 설치를 더욱 확대하고 그 운영과 이용에 대한 관리, 감독을 체계화해갔습니다. 그리고 일본군과 총독부는 조직적인 지원과 협력체계를 가동해 한국인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합니다. 위안부가 된 여성은 대부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거나 속아서 전선의 위안소까지 끌려갔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는 중국,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일본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엄혹한 감시 속에 비참한 생활을 견뎌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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