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Talk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

by 우공 박 2023. 2. 22.
반응형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농민군이 해산했음에도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본군은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조정에서는 민씨 척족 정권이 몰락하고 개혁적 관료가 중심이 되는 갑오 정권이 들어섭니다. 정권에서 소외된 흥선대원군은 전봉준에게 밀서를 보내 봉기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농민군을 이용해 갑오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한편 일본 낭인들은 일본군의 동학 진압 빌미를 찾기 위해 전봉준과 동학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동학농민군 사이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직후부터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지도부는 농민군의 세력을 확장하고 군량미와 무기를 확충하며, 농민군의 안정적인 운용과 전투 능력 향상을 도모합니다. 전봉준은 중앙정부의 동향과 일본의 동태를 면밀히 파악하는 한편 참여할 수 있는 농민군의 범위를 사족과 부호까지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다만 가을 걷이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군 봉기를 자제합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남접과 북접의 결합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전봉준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제2차 봉기를 본격적으로 추진합니다. 전봉준은 교통의 요지이자 대규모 병력 주문이 가능한 삼례에 각 고을의 집강소를 지휘하는 대도소를 두었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집강소에 통문을 보내 농민군을 결집하고 군량미와 무기 등 군수물자를 대도소로 보내줄 것을 촉구합니다. 남원과 나주에 각각 주둔했던 김개남!1853~1895)과 손화중(1861~ 1895)은 인접 지역에 통문을 돌려서 농민군을 모았습니다. 농민군은 인접 고을의 관아와 산성을 공격해서 봉기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합니다. 삼례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은 10월 12일에 전주성을 공격해서 화포와 탄환 등의 무기를 확보하게 됩니다.

 

한편, 최시형을 중심으로 온건파 동학지도자들이 이끌었던 북접은 주로 교조 신원운동에만 관심이 있어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이끄는 남접 중심의 제1차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2차 봉기가 다가오면서 최시형은 입장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10월 16일(음력 9월 18일) 최시형은 접주들에게 반일을 외친 전봉준의 기포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결과 북접의 영향 아래 있었던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에서도 농민군이 기포해 고을 관아를 공격합니다. 10월 말에 이르면 3남 지역에서 시작한 봉기가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일대로 확산됩니다. 남접의 농민군과 북접의 농민군은 논산에서 합세했습니다. 논산에서 대오를 정비한 농민군은 공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습니다.

우금치 전투

서울 진공과 농민군의 패배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나자,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합니다. 이를 두고 일본은 조선 정부가 동학농민군 진압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일본군이 양호도순무영의 지휘권을 장악해 진압을 실질적으로 주도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서울에 주둔한 제 18대대 일부를 전라도로 보냈고, 동학농민군을 없애려는 목 적으로 19대대를 조선에 추가로 파병합니다. 19대대는 1894년 10월 15일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용산 주둔지를 떠나 남하를 시작합니다. 일본군 지휘부는 19대대에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 근거지 공격, 농민군의 북쪽 월경 차단, 동학농민군 학살을 명령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일분군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조선 정부군의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전봉준은 가을걷이가 마무리된 11월 9일경 동학농민군에게 북상할 것을 명령합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감영을 총공세의 목적지로 삼았습니다. 손병희(1861~1922)가 지휘하는 동학 북접의 농민군도 이에 합세합니다. 하지만 일본군 19대대와 조선 정부군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합니다.

 

결국 11월 하순부터 공주를 둘러싸고 이인, 효포, 우금치에서 양측 간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됩니다. 공주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농민군이 패배하자, 전봉준은 논산 초포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각 지역에 원병을 요청합니다.

12월 6일(음력 11월 10일)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주력부대 가 주둔한 우금치를 압박하기 위해 효포와 이인으로 진격합니다. 다음 날에는 우금치를 향해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미 우금치 고지대에 방어 진지를 구축한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은 동학농민군을 향해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불리한 지형적 조건 및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의 우세한 화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우금치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고 맙니다. 김개남이 지휘한 동학농민군도 금산과 청주에서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합니다.

일본군의 중화기

일본군과 정부군의 진압

결국 농민군 지도부는 농민군 해산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은 계속 농민군 토벌 작전을 전개했으며, 그 과정에서 마을이 파괴되고 무고한 양민이 학살당했습니다. 1894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전봉준은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됩니다. 김개남도 친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처형당합니다. 법무아문은 전봉준에게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궁했지만, 전봉준은 그에 관해서는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 전봉준은 손화중 등과 함께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

동학농민전쟁은 반봉건, 반외세를 지향한 전국적 민중항쟁이었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처벌과 매관매직 근절, 노비제도 폐지 및 고른 인재 등용, 과부 재가 허용, 조세 및 토지제도의 개편을 요구하며 봉건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척왜양을 외치며 개항 이후 심화된 외세의 정치, 경제적 침탈과 일본의 군사적 침략에 저항했습니다. 동학에 참여했던 민중은 지역 연대를 통해 전국 단위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지향했습니다. 비록 동학농민전쟁은 진압됐지만, 그 경험 속에서 민중은 근대적 개혁, 의병운동,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체포된 전봉준


전봉준 공초

1894년 12월 2일 전봉준이 체포된 이후, 1895년 2월 9일에서 1895년 3월 10일까지 약 한 달간 총 5차례에 걸쳐 심문한 기록이다. 당시 농민군의 봉기 배경과 목적, 궁극적으 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심문: 비록 탐관오리라고 해도 명색이 반드시 뒷 일이 있을 것이니 상세히 말하라.

전봉준 진술: 지금 그 상세한 내용을 다 말할 수 없고 그 대략을 말하겠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보 아래에 보를 새로 쌓고는 가혹하게 민간에게 명령해 상등 논에는 1두락에 2말을 거두고 하등 논에는 1두락에 1말을 거두니 도합 세금이 700여 석이었고,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주어 경작해 먹는 것을 허락하면서 관에서 문서로 증빙해 징세하 지 않겠다고 하더니 정작 가을 추수기가 되자 강제로 거둔 일이요. 둘째는 부민에게 강제로 빼앗은 돈이 엽전 2만여 냥이고, 셋째는 그 아비가 일찍이 태인 군수를 한 적이 있으므로 그 아비를 위해 비각을 세운다 말하고 강제로 거둔 돈은 1,000여 냥이요. 넷째는 대동미를 민간에서 징수할 때는 고운 백미로 16말에 해 당하는 값을 정해 거두어들이고 상납할 때는 거친 쌀로 바꿔 그 차액을 착복한 일이요 그 외에도 허다한 내용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습니다.

(중략)

심문: 다시 기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전봉준 진술: 그 후에 들으니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민간에 일언반구도 언급 하지 않고 또 격문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 도성에 들어가 야반에 왕궁을 습격해 임금을 놀라게 했다 하기로 초야의 사족과 백성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비분강개해 의병을 규합해 일본인과 전투해 이런 사실을 우선 일차 따져 묻고자 함이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