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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군국기무처의 수립과 갑오개혁 추진

by 우공 박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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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1차 갑오개혁의 추진

일본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한 이후 조선에는 새 정부가 수립됩니다. 1894년 7월 27일 군국기무처가 창설되고,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하는 갑오개혁 정부가 출범합니다. 군국기무처에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중견 관료와 유길준, 김가진, 김학우 등 소장 개화 관료, 그리고 대원군 계열 일부가 참여했습니다. 총재 1명, 부총재 1명, 그리고 16명에서 20명 미만의 회 의원과 2~3명의 서기관이 참여했으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안건을 처리했습니다. 군국기무처는 여러 사회경제적 사안에 대한 개혁까지 맡았습니다.

 

중앙 정치기구를 개편하면서 의정부와 궁내부를 분리하고, 궁내부 산하의 여러 기구를 통폐합해 왕실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제한합니다. 또한 의정부 아래 내무, 외무, 탁지, 군무, 법무, 학무, 농상, 공무아문 등 8개의 아문을 두고 이전의 6조와 1800년대에 병설된 여러 아문들을 통폐합해 배치하였으며, 내무아문 산하에 경무청이라는 경찰기관을 따로 두었습니다. 종래 폐단이 많았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선거 조례를 제정해 유능한 관리 임용을 위한 절차도 마련했습니다. 그렇지만 주요 관리의 임면권은 모두 국왕에게 있어 칙임관은 왕이 직접, 주임관은 대신의 추천을 받아 임명했습니다. 판임관의 경우 대신 등 기관의 장이 알아서 임명하게 했습니다. 사회 부문에서는 중국의 연호 대신 조선의 개국기년을 사용해 개국 503년으로 선언했고, 과도한 형벌로 피해를 줬던 연좌법을 폐지했으며,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가했습니다. 이 시기 가장 획기적인 개혁은 종래 고질적인 계층 갈등을 일으켰던 노비신분제를 일거에 없애 노비의 매매와 세습을 전면 폐지한 조치였습니다.

 

또한 경제 부문에서는 종래 여러 기관으로 분산돼 있었던 국가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하고, 은을 화폐의 기본 단위로 삼는 은본위제를 채택했으며, 도량형을 통일했습니다. 지세의 금납화 조치를 시행해 종래 부세의 폐단도 개선했으나 궁장토, 역문토 등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소작제도를 개혁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1894년 10월까지도 조세 금납화의 시행원칙 등을 마련하지 못해 농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1차 갑오개혁은 종래 관행화된 폐단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각종 특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행위를 보장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수립을 지향하며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화폐제도와 관련해서는 본위화를 발행하지 않고 보조화인 백동화를 남발하고, 일본 화폐를 사용하도록 허락해 경제적 혼란을 낳은 동시에 일본 경제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했습니다.

군국기무처

 

2차 갑오개혁의 추진

1894년 9월 중순 평양전투에서 승리해 조선 전역을 장악한 일본은 10월 초 이노우에 가오루를 특명전권공사로 교체 파견해 조선 내정에 직접 간여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흥선대원군 세력을 탄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에 맞는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직접 20개조 내정 개혁 강령을 제시하고 박영효(1861~1939)와 서광범(1859~ 1897)을 영입해 고종과 갑오개혁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1894년 11월 중순 이후에 일본은 전국적으로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주도적으로 토벌해갔습니다.

 

12월에는 고종에게 종묘에 나가 개혁의 추진을 서약하는 「홍범14조」를 선포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청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실히 세운다는 명분을 강조하며, 이에 걸맞게 왕실의 규범을 제정한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국왕은 정전에서 사무를 보되 정무는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하며, 왕비나 종친 외척이 정사에 간여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또한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하고, 조세 법정주의 및 예산제도의 수립, 민법, 형법의 제정과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를 내세우는 등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 원칙을 밝혔습니다.

 

이후 일본은 의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의 제도와 유사한 내각관제를 출범시킵니다. 내부 외부 등 7부를 새로 개편했으며, 중추원을 단순 자문기구로 격하시키고, 재판소제도를 시행해 고등재판소, 개항장재판소, 순회재판소, 지방재판소 등을 설치했으며 종래 군수 등 지방관이 행사했던 재판권을 재판소에 귀속시켜버립니다. 또한 탁지부 산하에 세금 징수를 관장하는 관세사와 징세사를 따로 두어 부세 업무를 중앙에서 직접 관장하려고 했습니다. 또, 지방제도를 개혁해 복잡하게 분할되어있던 군현제도를 폐지하고 동일한 군제로 변경했으며, 종래 광범위한 지역인 8도제를 폐지하고 세분화된 지역으로 나눈 23부제로 개편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개혁은 지방 세력의 반발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편, 교육제도 대혁도 시작되었습니다. 1895년 2월 교육에 관한 조칙을 발표해 군주의 권위에 바탕을 둔 신민 교육을 천명하고 사범학교와 소학교 제도를 시행합니다. 고등교육기관을 설치하지 않는 대신, 일본에 유학생을 대거 파견해 개혁에 필요한 실무지식과 전문교과를 배우도록 했습니다.

 

한편 개혁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300만 원의 재정차관으로 충당했으나, 개항장 확대와 철도부설권 등 일본의 무리한 이권 요구가 뒤따랐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반대했지만, 가혹한 차관 조건 아래 재정위기가 이어졌고, 결국 1895년 말 일본에서의 국채 발행을 모색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조선 정부는 철도부설권에 따른 토지침탈과 재정 파탄에 따른 일본 경제로의 예속 위기에 동시에 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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