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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통치기구의 이원화와 식산흥업 정책

by 우공 박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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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기구의 이원화

대한제국 성립 이후 국가기관의 개편 결과 통치기구는 궁내부와 정부로 이원화되었습니다.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외세와 결탁되어있거나 황제의 명령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전달되어도 시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고종은 늘 자신의 의지대로 국정을 운영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때문에 자신이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황제 직속의 기구인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때문에 고종은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필요한 기구를 신설하거나, 궁내부의 기능을 확대해 주요 정무와 사업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정부기구를 폐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일한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기구가 정부와 궁내부 양쪽에 모두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통치기구를 이원화한 것으로 이후 상당한 문제점과 국정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사력의 강화

고종 황제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경찰력과 군사력의 강화였습니다. 개항 이래 군사력을 앞세운 열강의 압력과 국내의 잦은 정변으로 인해 국가의 자주독립과 군주의 신변이 계속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고종은 국내의 치안 확보와 경찰력의 강화를 위해 같은 해 6월 내부 산하의 경무청을 경부로 승격시키고, 최측근 인사 중 한 사람인 김영준을 경부대신에 임명해 경찰 업무를 총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1901년 3월 김영준이 모반사건을 일으키자, 경부를 다시 경무청으로 격하시키고 궁내부 산하에 경위원을 설치합니다. 이로 인해 경찰기구도 내부 산하의 경무청과 궁내부의 경위원으로 이원화되었습니다.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은 러시아 군사교관이 철수한 1898년 3월 이후 꾸준히 추진되엇습니다. 4월부터는 근대적인 군대의 장교 양성을 위해 육군무관학교를 설치하고, 우수한 사관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시킵니다. 1899년부터는 프랑스,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 각종 무기를 구입해 무기체계를 강화합니다. 군사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주목한 점은 모든 군대를 황제의 직속으로 편제했다는 점입니다. 고종은 1898년 6월 대원수가 되어 직접 육해군을 통수하고 황태자를 원수로 임명했습니다. 이듬해인 1890년 6월에는 원수부를 설치해 국방과 군사에 관한 모든 명령을 관장하고 중앙군과 지방군을 지휘 감독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군부의 기능은 대폭 축소됐고, 군부대신은 군사행정 사무만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군대의 편제는 중앙군을 친위대, 시위대, 호위대로 개편했고, 지방군으로 주요 도시에 진위대를 두었습니다. 중앙군은 황제와 황실의 호위를, 진위대는 지방의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군사력과 무기체계를 대폭 증강한 결과 정부 재정에서 군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지게 됩니다. 1901년 이후에는 세출예산 총액의 40%를 차지해 정부의 만성적인 재정 궁핍을 낳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병력은 모두 합쳐 불과 2만 8,000명 정도에 불과해 제대로 된 국가 방어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대한제국 군대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

대한제국은 농업 중심의 국가로, 토지세에 해당하는 결세가 국가의 가 장 큰 조세 수입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금 부과의 기준이 되는 토지대장의 관리가 부실했습니다. 실측에 의한 정확한 토지대장의 작성,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정확한 세원의 파악과 공평한 과세를 통한 재정 확보가 매우 시급한 사안이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1898년 7월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 6월 충청남도 아산군에서부터 양전사업을 시작합니다. 당시의 양전은 '시주(소유자)'와 '시작(작인)'을 구분해 토지소유관계를 명확히 하고, 두락 단위를 사용해 실측한 토지의 절대 면적을 통일해 표기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토지문서만 가지고 있으면 토지 소유자로 인정받았기에 권력자나 외국인이 불법으로 소유한 토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1901년 11월 진행 중이던 양전을 중단하고, 지계아문을 설립합니다.

 

지계아문은 양지아문을 흡수, 통합해 1902년 3월부터 양전을 통해 확인된 토지 소유자에게 정부가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 지계를 발급해줍니다. 이것은 국가가개인의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근대적 토지소유관계가 확립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사업이 중단됐으나, 정부는 그동안 전국 331개 군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의 토지를 조사 및 측량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금이 23% 늘어나는 성과를 냅니다.

지계

식산흥업 정책

근대화 추진에서 군사력 강화와 함께 역점을 뒀던 분야는 상공업 발달이었습니다. 근대화 사업에 필요한 재원 확대를 위해서나, 열강의 상권 및 이권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상공업의 발달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정부는 공장이나 회사를 고종 황제와 정부가 나서서 설립하거나 관료나 민간이 설립하는 것을 장려하고, 상공학교 우무학당 등 관립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며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상공업 정책을 추진합니다. 황실과 정부는 주로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기간산업에 직접 관여했는데 한성전기회사와 철도 건설 사업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황실은 1898년 미국

인 헨리 콜브란(Henry Collbran), 해리 보스트윅(Harry R. Bost-wick)과 합자해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이들에게 전차, 전등, 전화 사업의 독점권을 줍니다. 이를 통해 궁궐에 전화와 전등이 가설되고 서울 시내에 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경인철도와 경부철도는 일본이 부설한 것이기에 다른 철도만의 건설은 대한제국 정부가 주도하려고 계획합니다. 1898년 7월 정부 산하에 철도사(이후 '철도국')를 설치해 서울~ 목포 간 철도 및 영남지선의 철도 부설을 계획했는데, 고종은 경의철도를 반드시 자력으로 부설하기 위해 1900년 궁내부 산하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고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기술과 자본이 부족했고, 일본의 강압으로 러일전쟁 직후 부설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한국의 간선철도는 모두 일본이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재정 관리와 상공업 진흥을 위한 금융 지원을 위해 은행의 설립이 절실해지자 전현직 관료나 대상인에 의해 1897년 조선은행과 한성은행, 1899년 대한천일은행 등이 설립됩니다. 은행 등 금융기관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화폐의 실질가치를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환국에서 계속 백동화를 남발하면서 화폐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고, 시장이 교란되었습니다. 일본의 제일은행은 1902년 한국 정부의 승인 없이 제일 은행권을 발행해 유통시키는 일을 벌였는데, 이에 고종은 1903년 중앙은형 조례를 제정하고 자력으로 금지금을 모아 정화를 발행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담당할 중앙은행의 설립을 준비합니다만 이 역시 러일전쟁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은행 다음으로 관료자본의 진출이 활발했던 분야는 교통, 운수 회사였습니다. 우체기선회사, 대한 협동기선회사, 대한협동우선회사 등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국내외를 왕래하는 대규모 회사들이 속속 설립됩니다. 경부철도 공사의 하청을 맡기 위해 대한국내철도회사, 대한경부 철도역부회사 등 토건 회사도 속출했다. 한편, 제조업 분야의 회사 설립은 상대적으로 부진했습니다. 대한제 국인공양잠합자회사, 대조선저마제사회사 등이 설립됐으나, 기술력이 부족하고 관세 등 국가적인 보호 장치가 없어서 일본의 기계로 만든 제품을 넘어설 만한 경쟁력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이처럼 고종 황제는 궁내부를 중심으로 재원을 확대해가면서 각종 근대적 시설과 제도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당시 대한제국의 자본과 기술력의 부족, 열강의 압력 및 상권 침탈, 러일전쟁의 발발 때문에 큰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서울의 전차
경인선 개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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