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만주 점령
아관파천 이후 한반도에서 러일 간의 세력균형은 1900년 청에서 일어난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걸고 의화단이 격렬한 외세 배척운동을 벌이자, 영국, 러시아, 일본 등 8개국은 연합군을 파병해 진압했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다른 열강이 반발했음에도 철병하지 않고 사실상 만주를 점령해버립니다. 1901년 1월에는 열강이 공동으로 보증했던 한국 중립화안을 일본에 제시했고, 2월에는 청군의 만주 주둔을 금지하고 러시아의 허락 없이 이권 양도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협약을 청에 강요합니다. 청은 열강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이로써 만주를 독점 지배하려는 러시아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이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원로 들은 일본의 군사력이 아직은 러시아에 맞설 만큼 강하지 않다고 보고 만주에서 러시아가 얻으려는 이익과 한반도에서 일본이 누리려는 지위를 서로 보장하는 타협안을 주장했습니다. 반면 총리대신 가쓰라 타로와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 등 정부 당국자는 러시아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영일동맹론을 주장했습니다.

제1차 영일동맹의 성립
삼국간섭(1895) 이후 일본은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해 급격히 군사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의화단운동을 진압하는데 총 2만 2,000명의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해 강화된 군사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8개국 연합군 전체 병력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규모였습니다.
일본이 구축해가던 군사력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남하 저지에 대한 영국과 일본의 이해가 일치하자 양국의 교섭은 급속히 진전돼 1902년 2월 「제1차 영일동맹」이 성립됩니다. 영국과 일본은 청과 한국에서 취할 서로의 이익을 인정하고, 동맹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개시하면 엄정중립을, 2개국 이상이 동맹국과 전쟁하게 되면 공동 참전한다는 내용을 영일동맹에 담았습니다. 이것은 러일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와 독일이 참전하면 영국도 참전해야 한다는 의미로, 결국 프랑스와 독일의 대일참전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전의 삼국간섭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쟁 위기감의 고조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자 러시아는 중국과 열강에 만주 철병을 약속하고 1902년 10월 1차 철병을 실행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 내에서 황제 니콜라이의 측근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를 중심으로 철병에 대한 비판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만주에 군사력을 더욱 증강해 만주와 한반도를 독점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2차 철병을 이행하지 않고, 만주에서 러시아의 특권을 보장하는 7개조 요구를 청에 강요하는 한편, 한국의 용암포를 불법으로 점령하면서 1903년 5월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신노선을 공식화합니다. 이에 일본은 한반도를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러시아에 6개조의 협상안을 제시합니다. 러시아는 만주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답하며, 한반도의 북위 30선 이북의 중립지대화를 요구합니다. 이후 양국은 전쟁 의 명분을 쌓기 위한 지루한 외교 공방을 전개합니다.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영국은 영일동맹에 따라 엄정중립을 표방했으나 미국은 일본에 우호적 중립을 표방합니다. 당시 만주는 미국 산업의 저임금 유지를 위한 저가의 농산물 수입처이자, 면제품의 주요 수출시장이어서 러시아가 독점으로 지배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고종 황제는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1904년 1월 국외중립을 선언했지만, 이는 열강으로부터 가볍게 무시되었습니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이미 1903년 12월에 "군사적인 실력행사를 통해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둔다"는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러일 전쟁의 발발과 한일의정서 체결
일본은 1904년 2월 4일 전쟁을 결정하고, 8일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을 공격하며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와 동시에 한국에 군대를 파견해 9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지역을 점령해갔습니다. 23일에는 한국 점령을 사후에 합법화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는데, 일본이 군사상 한반도의 필요한 지점을 임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정치, 군사 부분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음을 의미합니다. 일본은 9월까지 한국주차군을 2개 사단으로 증원 배치해 한국을 사실상 군사적으로 점령합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체결과 종전
러일전쟁은 20세기 최초의 국제전이자 산업화 이후 국가의 경제력이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현대전의 특징이 처음으로 나타난 전쟁이었습니다. 개전 이래 일본은 전시물자와 전쟁경비를 조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른 국가들이 일본의 승전 가능성을 낮게 보고 일본의 전시채권을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05년 1월 일본군이 뤼순항을 함락하면서 전시 채권이 팔리기 시작해 전비 조달에 숨통이 트이게 됩니다. 반면 러시아는 이 여파로 외부적으로는 국가 위신이 추락했고, 내부에서는 노동자들에 의해 제1차 러시아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육상전에서 승리를 계속하고 동해해전에서 연합함대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면서 일본의 승전은 명확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국력이 고갈돼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인력도 경제력도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혼란한 국내 상황 속에서도 병력과 물자를 모아 반격 태세를 갖춘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지속된다면 이후 전세의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발틱함대를 격파해 전쟁 성과가 최고에 달한 시점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동시에 한국을 보호국으로 확정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강화조약의 중재를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에 의뢰합니다. 하지만 당시 만주로 세력 확장을 노리던 미국과, 청에서 가장 큰 세력권을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만주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러일전쟁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가 중재한 「포츠머스강화조약」(1905)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과 남만주철도의 귀속, 그리고 사할린 남부의 영토를 할양받는 것을 인정했지만, 전쟁 배상금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열강들의 승인
일본은 러일전쟁의 비용으로 총 19억 8,000만 엔을 지출했는데, 이는 평시 1년 국가예산의 6배를 초과하는 규모였고, 그중 13억 엔은 전시공채로 조달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쟁 중 증세에 허덕이던 민중은 강화조약의 내용에 대한 불만을 품고 히비야 폭동사건을 일으킵니다. 일본 내부에서 반발이 컸음에도, 일본 정부는 전쟁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목적인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았기에 강화조약을 수용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막바지인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해 영국으로부터, 9월에는 「포츠머스강화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보호, 지도 및 감독 의 권리"를 승인받습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만한 조치를 할 경우에는 한국 정부와 합의한 후 집행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았고, 영국과 미국 등 열강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러일전쟁 후 일본의 즉각적인 한국병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외교권 침탈
이토는 일본 정부의 특파대사로 한국에 와서 일본군으로 경운궁(덕수궁)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합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은 한국에서 공사관을 철수시켜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인정합니다.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단계적으로 침탈해갔습니다. '시정개선'을 구실로 1904년 8월부터 일본은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와 외교고문 미국인 스티븐스(D.w. Stevens, 1851~1908)를 비롯한 다수의 외국인 고문, 보좌관 등을 한국 정부에 고용해 국정을 감독하게 합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습니다. 통감은 한국에서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며, 한국의 외교와 시정개선의 명목으로 한국 정부 및 외국인고 문관 등을 감독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만 감리하도록 규정돼 있었음에도, 한국의 각부 대신들과의 협의체인 시정 개선협의회 등을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이 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한국 정부와 통감부가 병렬적으로 존립하는 이중 권력구조였습니다.

헤이그특사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주권 침탈은 더욱 강화됩니다. 고종 황제는 1907년 6월의 제2회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그리고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 1949)를 특사로 파견합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특사를 파견하는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으나, 저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헤이그에서 한국 특사단이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도 직접 제지를 하지 않고 방관합니다. 이는 일본이 이 기회를 통해 열강으로부터 한국 측의 회의 참가 불허를 약속받아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공인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헤이그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제3 차 한일협약(정미조약)」(1907)을 체결해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합니다. 이렇게 이중 권력이 종식되고, 통감이 한국의 외교와 내정을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최고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역사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병투쟁과 의열투쟁 (0) | 2023.02.27 |
---|---|
애국계몽운동과 국학운동 (0) | 2023.02.26 |
통치기구의 이원화와 식산흥업 정책 (1) | 2023.02.23 |
황제권 전제화와 정치 세력 재편 (1) | 2023.02.23 |
독립협회와 고종의 갈등 (0) | 2023.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