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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애국계몽운동과 국학운동

by 우공 박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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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의 대두

러일전쟁과 일본군의 주둔으로 고종의 황제권이 위축되기 시작하자 한국도일본과 같이 국정을 개혁해 근대 국민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이 시기는 국가의 독립이 위협받는 상황이었기에 민권운동에서도 이전의 독립협회운동과 달리 민권보다 국권을 강조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겼기에 애국계몽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근대교육을 받은 신지식인들은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한 근본 원인이 한국의 실력이 부족한 데서 비롯됐다고 인식했습니다. 이들은 문명개화론, 사회진화론 등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교육과 산업진흥으로 국가 발전의 토대를 세우고, 민중에 대한 계몽운동을 통해 민권을 신장하며 정치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실력양성론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정치 사회단체의 활동, 식산업활동, 교육구국운동, 언론계몽운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됐던 것입니다.

이 시기 민권운동과 정치운동은 신민회를 제외하면 대체로 입헌군주제에 기초한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주장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애국계몽단체의 활동

한편 러일전쟁 중인 1904년 6월 일본은 한국 정부에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했는데, 이는 국토의 30%에 해당하는 방대한 면적이었습니다. 이에 송수만, 이기 등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해 1905년 보안회를 조직하고, 반대운동을 펼쳐 일본의 토지 강탈 음모를 좌절시켰습니다. 그러나 보안회와 헌정연구회 등은 서울에 집중돼 있었고, 결국에는 강제 해산되면서 그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인 간에서는 반일의식이 높아졌고, 1906년 이후에 는 이와 관련된 전국 단위의 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3월에는 윤효정, 장지연, 나수연 등이 헌정연구회를 확대, 개편해 대한자강회를 설립하고, 교육과 실업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려는 운동을 전개합니다. 대한자강회가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중심인물은 천도교 세력과 연합해 1907년 11월 더욱 큰 규모의 대한협회를 조직해 입헌군주제를 추진했습니다. 민권운동이 성장하자, 통감부와 한국의 친일내각은 「신문지법」과 「보안법」을 공포해 민권운동단체를 탄압합니다. 이에 대항해 대한협회의 지도부는 일진회 서북학회와 연합해 이완용이 주도하는 친일내각을 타도하고 권력을 차지하려 했으나,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이후 일본의 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활동이 위축됩니다.

대한자강회 월

 

학회와 교육운동

민권운동에 기반을 둔 정치, 사회단체의 활동 외에 교육 및 학술단체를 표방한 많은 학회들이 전국 각지에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해당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평안도 황해도에서 서우학회가, 함경도에서 한북흥학회가 설립돼 활동했다가, 1908년 1월 두 학회는 서북학회로 통합됩니다. 이외에도 전라도의 호남학회, 경상도의 교남교육회, 강원도의 관동학회 등이 설립되었습니다. 일본 유학생들은 태극학회, 대한유학생회, 대한학회, 대한흥학회 등 유학생회를 조직해 활동했습니다. 이 학회들은 사회, 정치단체와 마찬가지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시기 교육운동은 학교를 설립해 근대 서구의 학문을 중심으로 한 신교육을 실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는 교육을 통해 근대적 정치의 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노력한 실력양성운동으로, 각 지역에 설립된 학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무려 3,000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됐고 민간에서 편찬된 교과서를 이용해 민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처럼 학교 설립이 급격히 확산되자, 통감부는 1908년 8월 학교 설립 허가, 교사 자격 제한, 검정교과서 의무 사용 등을 규정한 사립학교령을 공포해 교육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기에 이릅니다.

 

언론운동

언론운동은 주로 신문을 통한 국민 계몽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황성 신문은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렸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 Bethel)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통감부의 검열을 피해 일제의 침략상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이외에도 여성과 하층민을 대상으로 했던 제국신문과 천도교에서 발행한 만세보 등도 국민 계몽에 노력했습니다.

민족종교운동

민족종교운동은 통감부의 종교계 친일화 공작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유교에 대해서는 1907년 대동학회를 설립하게 했고, 불교에 대해서는 일본 불교의 세력 확장을 기도합니다. 동학에서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의 지시로 1904년 이용구가 일진회를 조직합니다. 그러나 일진회가 을사조약에 찬성하는 등 친일 행태를 보이자 손병희는 귀국 후 일진회와 관계를 끊고, 1905년 12월 기존의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해 국민 계몽과 민족운동에 참여합니다.
나철은 1909년 단군을 국조로 하는 단군교 '대종교'를 창건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유림 중 일부는 기존 유교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대동교를 창건해 계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국학운동

국학운동은 국어와 한국사 등 국학을 진흥시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집중되었습니다. 갑오개혁 이래 국한문이 병용되어 국어 사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분위기에서 주시경 등은 국어 연구와 보급에 노력합니다. 국사학에서는 1890년대 후반부터 점차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역사학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신채호는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에 대한 전기를 써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사신론」 등을 발표해 민족주의 역사관을 형성합니다.

신채호

신민회의 활동

민권운동단체의 활동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1907년 4월 안창호와 양기탁, 신채호 등은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합니다. 신민회는 중앙에 집행부를 두고 지방에는 군 단위까지 책임자를 임명해 국권 회복과 함께 공화정제의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활동합니다. 이후 망국의 위기가 고조되자, 1910년 3월 만주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도모하기 위해 독립군 기지 건설 계획을 확정합니다. 그리고 1911년 이동녕, 이회영 등은 만주의 평텐성 류허현 삼원보에 한인촌을 만들고, 경학사와 사관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가 됨)을 설립해 신민회 계통의 독립군 기지를 건설합니다.

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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