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투쟁의 전개
민권운동이나 계몽운동과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침략에 맞서 직접 항거하는 민족운동도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의열투쟁과 '의병투쟁'으로 구분되는데, 의열투쟁은 국가에 대한 충절을 지켜 자신의 죽음으로 항거하는 '순절'과 개인 혹은 소수의 결사로 침략의 당사자나 이에 협조한 한국인을 무력으로 응징하는 '의거'를 함께 지칭합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생과 전직 관료들의 반대하는 목소리와 함께 이완용, 박제순 등 이른바 '을사5적'의 주살을 주장하는 상소가 쇄도합니다. 상소로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전 참판 홍만식을 시작으로 시종무관장 민영환, 전 의정대신 조병세 등 많은 사람들이 순절로 이에 항거했고 이는 전국적으로 배일 감정을 크게 자극하게 됩니다.
1907년 7월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도 해산됩니다. 이에 한국에서는 황제의 퇴위를 반대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직접적인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고종의 퇴위가 결정된 직후인 7월 19일 서울의 민중은 일진회 회원들과 유혈충돌을 벌였고, 일진회의 기관지를 발행하는 국민신보사를 습격합니다. 대안문(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일본 순사 및 헌병과 투석전을 벌였으며, 종로 집회소에서는 시위대 병사 수십 명이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전개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퇴위 반대와 친일파 타도를 외치는 민중시위는 평양, 개성, 대구, 대전, 안성, 동래 등 지방에서도 격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개인의 힘으로 침략의 중심인물을 직접 응징하려는 의거가 계속됩니다. 한국의 외교고문으로 일본에 협조했던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1851~1908)는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하면서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폭언을 합니다. 이에 분노한 청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그를 사살해버립니다. 이 사건은 미국 내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마련했고, 해외 항일운동의 연합전선 구축에 자극을 주게 됩니다.
항일의병투쟁의 전개
한편 을사조약을 계기로 많은 의병이 일어나 항일투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의병 투쟁은 일제의 침략에 조직적이고 집단화된 무력으로 항쟁한 민족운동이었습니다. 일본군과 가장 큰 전투를 치른 의병은 충남의 홍주 의병이었습니다. 홍주 유생 안병찬은 을사조약에 대한 소식을 듣고, 민종식을 총수로 추대해 1906년 3월 예산에서 봉기합니다. 이들은 5월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퇴하고, 지도부는 일본의 쓰시마로 유배됩니다. 전북 태인에서는 6월 최익현이 임병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관아를 점령했으나, 진위대의 공격을 받자 동족 간의 살상을 피하기 위해 의병을 자진 해산합니다. 이후 일제 관헌에 체포된 최익현은 쓰시마로 유배돼 순국했습니다.
평북 태천의 의병 봉기에는 현직 관찰사와 군수가 적극적으로 협조해 참여 세력의 확대를 꾀합니다.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의 의병부대는 경북과 강원도의 접경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술을 펼치며 일본군에 타격을 줬습니다. 특히 이들의 활동은 유생층이 아닌 평민층의 독자적 봉기라는 점과 후기 의병까지 지속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의병운동은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군대 해산 등을 계기로 더욱 치열해졌는데, 특히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대거 참여하면서 전술과 무기가 보충돼 전투력이 강화되기도 합니다. 군대 해산 당일 시위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이 자결했고, 소속 군인 1,600여 명이 도성 내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어서 원주진위대, 강화 홍주 진주 안동분전대 등이 일본군과 교전 뒤 의병에 합류합니다.
의병부대의 연합작전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의병부대의 연합작전도 시도되었습니다. 1907년 11월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및 민공호, 이강년, 이은찬 등을 중심으로 13도 창의군을 설립해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합니다. 이인영은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발송해 서울 탈환을 호소했습니다. 또한 서울 주재 각국 영사 관에 통문을 보내 의병부대를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1908년 1월 1만여 명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했고,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는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합니다. 그러나 후속부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맙니다. 이후 13도 창의군도 해산했으나, 각각의 의병부대는 근거지로 돌아가 항일전을 계속해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애국계몽운동계열과 의병투쟁계열의 대립과 갈등
한편 민권운동과 계몽운동을 벌이던 일부 계열에서는 통감정치에 잘못된 기대를 갖거나, 일본의 침략정책에 이용돼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해서 의병투쟁 계열로부터 항일성과 혁명성이 결여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반면 이들은 의병투쟁을 실력을 갖추지 않은 무모한 폭력투쟁이라고 매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의 양자 간의 인식 차이는 운동 의 진행과정에서 서로 협력하기 어려운 제약요인으로 작용했고, 그 결과 상호 비방하거나 살상하는 등 대립과 갈등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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