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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일본의 한국병합

by 우공 박 202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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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의병탄압으로 한국병합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한 이토는 만주시찰에 나섭니다. 러시아 정부의 대표인 재무대신 코코프쵸프(V.N. Kokovtsor)를 만나 만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미국에 공동 대응할 방안을 모색하고 한국병합에 대해 러시아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토는 10월 26일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안중근에게 사살당하고 맙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는데 일본 내에서는 즉각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우익 낭인 우치다 료헤이로부터 지시받은 일진회는 12월 「합방청원서」를 작성해 한국 정부와 통감부에 제출했으며, 「합방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합니다. 이토 사망을 계기로 한국병합이 즉각적으로 실행될 것 같은 분위기가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일본 정부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열강이 한국병 합을 승인하지 않은 상황에서 안중근의 이토 사살사건으로 인해 한국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부상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자칫하면 다시 열강의 간섭으로 그동안 추진해온 한국병합이 좌절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내각수상 가쓰라는 곧바로 열강에 "당분간 이토의 한국정책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는 한국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 '안중근 의거'의 의미를 축소시켜 안중근에 대한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을 일축합니다.

안중근

 

강대국의 승인

한국병합의 조건은 1910년에 들어서며 마련됩니다. 만주에 대한 문호개방 및 철도 부설의 문제로 미국의 개입이 강화되자, 러시아와 일본은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제2차 러일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갑니다. 협상 중이었던 4월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병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최종 양해를 마침내 얻어냅니다. 5월에는 영국으로부터도 동일한 양해를 얻게 됩니다.

 

러시아와 영국이 한국병합을 양해하자, 일본은 마침내 실행을 결정합니다. 일본 정부는 5월 30일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제3대 통감에 임명하고, 6월 3일에는 한국 통치에 대한 개략적인 방향을 설정한 「병합 후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의 건」을 결정합니다. 데라우치는 일본 정부의 각 부처 실무책임자들을 모아 병합준비위원회를 조직해 한국병합의 구체적인 실행안을 만들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 '병합'은 조약을 체결해 실행하고, 한국에서는 당분간 일본 현법을 적용하지 않으며, 총독 에게 입법, 행정, 사법의 전권을 부여하고, 한국 재류 외국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등 모두 22개 항목의 「병합실행방법세목」이 입안돼 7월 8일 일본 정부의 각의에서 통과됩니다. 이후 한국병합은 신속하게 진행됩니다. 데라우치는 7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고, 곧바로 한국에서 모든 정치 집회와 연설회를 금지하고 무력시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8월 16일부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한국병합 실행을 위한 협상을 시작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한국병합조약 체결

이완용은 협상과정에서 두 가지 부분에 대해서 수정 요구를 했습니다. 병합 후에도 '한국'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한국 황실을 '왕'으로 존칭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데라우치는 '한국'을 그대로 사용하면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독립국가로 흔동할 소지가 있다며, 원안에서 제시한 지역명인 '조선'으로 결정합니다. 황실의 존칭에 대해서는 고종과 순종은 '태공'으로 황태자는 '공'으로 제시했으나, 한국의 민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의견을 수용해 고종은 '이태왕', 순종은 '이왕', 황태자는 '영친왕'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으로 담판은 종결됐고,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체결됐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8월 29일 한국병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협상이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제시한 「한국병합안」을 이완용이 대부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중적이고 차별적인 통치구조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는데, 그 구조가 기이했습니다. 한국병합은 영국의 인도 지배와 같이 식민지 모국과 식민지가 확실히 분리되는 형태가 아니라 한국이 일본의 새로운 영토로 편입돼 하나의 지역으로서 '조선'이 되고, 한국인의 국적도 일본으로 바뀌어 일본인이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한국 지역에서도 일본의 헌법이 시행돼야 했고, 한국인은 일본인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보장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문화수준(민도)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이유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조선총독의 제령 및 부령 등과 같은 특별 명령을 내려 통치했습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도 한반도 및 한국인을 일본 본토 및 자신들과 동등하게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본토를 내지라고 해 영역적으로도 한반도와 명확하게 구분했고, 한국인을 '조센진(조선인)'이라 부르며 일본인과 확실히 구분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은 일본의 필요에 따라 일본의 영토이기도 하고, 식민지이기도 한 이중적이고 차별적인 통치구조로 병합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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