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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alk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배 유형

by 우공 박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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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배 유형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배 유형은 이념을 기준으로 동화주의, 자치주의, 협력주의로 나누거나, 통치 방식을 기준으로 직접통치, 간접통치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영국은 자치주의에 입각한 간접통치를 원칙으로 삼았는데, 인도통치가 대표적입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초기에는 동화주의의 입장이었으나 점차 한발 물러선 협력주의로 바뀌어갑니다. 협력주의는 현지의 관습, 제도, 기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동화주의와 다르고, 식민지를 독립된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치주의와 구분됩니다. 미국의 식민지배는 일관되게 자치주의를 내세우고 행한 특징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제창한 민족자결 원칙은 바로 자치주의를 전 세계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자치주의는 20세기 미국의 세계 전략과 부합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기 후진국정책의 원형을 이룹니다.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은 유럽 열강의 사례를 참조하면서 자신만의 지배 방식을 만들어갑니다. 먼저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에 직접 편입합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영유한 대만에 대해서는 일본의 헌법과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총독에게 입법, 사법, 행정권을 부여하는 특별통치 지역, 즉 외지로 삼았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할양받았으며, 중국 랴오둥 반도의 조차권도 넘겨받았습니다. 그리고 1910년에는 한국을 강제병합해버립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독일 식민지였던 미크로네시아가 일본의 위임통치 지역이 됐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 지역을 점령한 일본은 이곳을 식민지로 삼는 대신 1932년에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웁니다. 새로 식민지를 만들기 어려웠던 당시 국제 정세를 의식한 조치였지만, 유럽 열강의 인정을 받지 못하자 일본은 국제연명을 탈퇴합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 점령지에 몇 개의 괴뢰정부를 세웠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을 편입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세력권을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일제의 침략 영역

일제 식민지배의 보편성과 특수성

일본의 여러 식민지와 점령지 중에서 한국은 인구가 많고 영토의 규모가 크며 오랫동안 독립국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1905년 을사조약을, 1910년 병합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식민지기를 가리키는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병합조약의 강제성과 무효성을 강조하려는데서 온 표현입니다.

일본은 인종과 문화 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자국의 한국 통치는 유럽의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배와 다르다고 선전했습니다. 유럽 열강의 동화주의가 근대 문명을 전파한다는 사명감에서 나온 것이라면, 일제의 동화주의는 일선동조론과 같은 혈통적 근친성에 기댄 측면이 컸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는 한국을 대만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헌법과 법률이 적용되지 않는 외지로 삼습니다. 일본의 모든 법률은 부칙을 통해 규정하지 않는 한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한국인을 새로운 국민이라고 선전했지만, 한국인들은 일본 본국 사람들이 누렸던 일반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 피식민자에 불과했습니다. 일제는 민족동화를 내세우면서도 민족차별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지리적 근접성과 인종적 유사성을 고려할 때, 일본의 한국 지배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와 비교할 만합니다. 영국도 아일랜드를 식민지라고 부르지 않고 본국의 일부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1919년 독립전쟁을 일으 켰고 영국과 협상 끝에 1922년 아일랜드자유국을 세우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 한국의 자치와 독립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같은 식민지인 한국과 대만을 지배하는데도 차이가 보였습니다. 한국은 대만에 비해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아 일본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았습니다. 시기에 따라 조금씩 성격이 변하기는 하지만, 크게 보면 대만이 경제적 식민지였던데 비해 한국은 경제적 식민지 이상으로 군사적 식민지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일본에게 한국은 대륙 침략의 발 판이라는 의미가 컸던 것입니다. 대만이 중국의 한 지방이었다면 한국이 오랜 독립국이었다는 점도 차이를 낳았습니다. 한국인의 독립 의지에서 비롯된 저항을 꺾기 위해 일본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만에는 한동안 문관이 총독으로 임명된데 비해, 한국은 식민지기 내내 육해군 대장 출신이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비식민지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의 식민지는 해방됩니다. 국제연맹을 대신해 1945년 성립한 국제연합(UN) 또한 새로운 식민지 획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엔은 추축국의 식민지에 대해 일국의 위임통치 대신 여러 국가의 공동 신탁통치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연합국의 식민지도 점차 비식민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1960년은 한 해 동안 아프리카에서만 17개 나라가 독립해 '비식민화의 해'라고 불렸습니다. 같은 해 열린 제15차 유엔총회는 '식민 지역 및 인민에 독립을 부여하는 선언'(일명 '비식민화 선언')을 채택해 남아 있는 식민지에 독립과 자치를 부여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21세기인 오늘날 명목상의 식민지는 지구상에서 거의 소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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