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발생
1910년대에 헌병경찰을 앞세운 일제의 무단통치는 31운동이라는 거족적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3.1운동은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와 역량을 보여준 대사건이자, 20세기 약소민족해방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세계사적 사건이었습니다. 3.1운동은 일본 정부와 정계에도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일부 친일협력자들을 제외하고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 항쟁은, 기존의 식민 통치 방식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3.1운동 이후 일본 정부는 새로운 통치 방식으로 '내지(일본)연장주의'를 채택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에서와 같은 방식과 제도로 식민지 조선을 차별 없이 통치함으로써 한국인의 저항을 무마하고, 점진적 동화를 추진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환을 주도한 일본 수상 하라 다가시는 조선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내지연장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통치 방식의 변화
하라의 추천으로 1919년 8월 제3대 조선충독에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새로운 통치 방침을 '문화정치'로 이름붙였습니다. 사이토는 문화통치를 “문화적 제도의 혁신으로 조선인의 행복과 이익 증진을 도모하고, 문화 발달과 민력 충실에 따라 장차 일본인과 동일하게 대우하는 정책"으로 규정했습니다. '조선인 본위'의 정책을 실시하고, 점진적으로 차별을 해소하겠 다는 점을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식민지 관료제와 지방행정, 경찰제도도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총독에 현역 육군 장성만 임명되도록 한 것을 고쳐 문관도 가능할 수 있게 했고(실제 현역 장성이 아닌 자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사례는 물론 없었습니다),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꿉니다. 또, 언론, 출판, 집회는 제한적으로 허용했고, 조선인 지방 유력자를 포섭하고 회유하기 위해 부,면협의회와 도평의회를 신설합니다.
'문화통치'의 기만성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식민지배구조가 더욱 강화됩니다. 헌병경찰은 없어졌지만, 헌병경찰을 포함해 1만 4,000여 명이던 경찰은 1만 8,000여 명으로 대폭 증원됩니다. 언론, 출판, 집회는 엄격한 검열과 허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관직에 진출한 한국인 숫자는 늘었지만, 그 대부분은 하급직이었습니다. 부, 면협의회와 도평의회는 의결 권한 없이 부윤, 면장, 도지사의 자문 역할만 수행했습니다. 게다가 일정액 이상의 지방세를 납부하는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기에 한국인 대부분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예컨대 도시에 해당하는 부 지역의 전체 인구 가운데 유권자의 비율을 보면, 1920년 한국인은 1.2%(4,714명), 일본인은 3.6%(6,252명)에 불과했고 민족 간 격차도 컸습니다. 1931년에 총독부는 지방제도를 개정해, 기존의 지방자문기구를 폐지하는 대신, 의결 권한이 일부 허용된 지방자치기구인 도회, 부회, 읍회 등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도지사나 부윤이 도화나 부회의 의장을 맡아 직접 의결을 취소할 수 있었고, 도회 의원 1/3은 관선이었던데서 알 수 있듯이, 도회, 부회, 읍회는 의결 권한이 제한적인 관제기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부 지역의 유권자 비율 또한 여전히 낮았고, 민족 간 격차는 오히려 커졌습니다(1931년 기준: 한국 인 2.6%, 일본인 14%).
친일협력 세력의 양성
한편 총독부는 친일협력 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데 특별히 주력합니다. 3.1운동을 저지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취약한 친일협력 세력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한국과 일본의 자산가들을 연결시키고 친일파가 결성한 친일단체를 후원하고 육성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지방행정기관에 자문기구를 둔 데에도 지방의 유력자들을 끌어들여 체제협력 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일제가 식민지배구조를 강화하고 친일협력 세력을 육성하고 있었지만, 문화통치가 실시되면서 한국인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개벽」 등의 한글 신문뿐 아니라 잡지와 출판물이 크게 늘어났고, 근대 사상과 문화가 확산되었습니다. 청년운동, 여성운동 단체 등이 조직되고 활동하면서 대중적 민족운동의 기반이 마련됐고, 사회주의운동도 본격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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